밑줄을 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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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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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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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머리 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쨍하게 맑아진다. 영하 15도의 겨울바람에도 가족들의 얼굴이 활짝 핀 매화처럼 환하다. 얼마 만인지 그동안 이런 시간을 잊고 지낸 게 미안해진다. 다른 이들은 쉽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던 것 같다.

모처럼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들, 딸과는 몇 번 같이 갔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한 것은 한참 만이었다. 서로의 일정을 맞추는 게 쉽지도 않았지만, 그간 남편은 가족에게만은 협조적이지 않았다. 올해엔 딸의 양력 생일과 나의 음력 생일이 용케도 같은 날이었다. 딸의 제안으로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아들과 남편도 동행하기로 해 갑자기 성사된 것이었다. 떠나기 전부터 아이들의 얼굴에 걱정과 설렘이 어른거렸다.

여행의 묘미는 가기 전 준비하는 단계일 것이다. 며칠 동안 어디로 갈까 숙소를 정하고 근처 맛집을 알아보고 각자 어떤 복장으로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생각만으로도 며칠을 설레게 된다. 마침 여행의 고수인 막냇동생의 조언을 얻어 지역의 맛집을 추천받아 정해놓고 출발하기로 했다.

첫째 날, 울진 통고산 휴양림에 짐을 풀었다. 가는 길에 미리 가기로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수산시장에 들러 조개며 해산물을 잔뜩 사 들고 조금 일찍 체크인 했다. 하루 전날의 폭설로 산과 강은 티 하나 없는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남편과 딸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밭에 발자국부터 새겼다. 평소에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짜증만 내던 남편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부녀지간에 마주 보며 웃는 얼굴이 참 많이 닮았다.

얼마 전부터 나는 남편과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바람이 억만년 나뭇잎을 종잡을 수 없게 건드는 것처럼 내게 남편은 수십 년 동안 감당하기 힘든 그칠 줄 모르는 돌풍이었다. 쌓이고 곪았던 것들을 오려 낼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뼈를 뚫고 나온 칼 같은 말들만 오갈 뿐 나는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상처 속에 가시를 촘촘히 숨기고 터럭만큼의 정도 없이 오로지 측은지심만 붙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른 네 명이 쓰기에 예약된 휴양림은 비좁고 불편했다. 방 하나와 거실 겸 주방이 전부였다. 딸과 나는 방을, 남편과 아들은 거실을 쓰기로 하고 저녁을 준비했다. 낮에 시장에서 산 고동과 소라, 대왕조개와 문어를 삶고 그 육수에 라면을 넣고 끓였다. 캔 맥주 하나에 목덜미까지 불그레해진 아들과 판다처럼 눈두덩이만 빨개진 딸이 참새처럼 재재거렸다.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 때문에, 나는 술이라는 말만으로도 치를 떨었다. 그런데 웬일로 남편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이들이 오래된 기억을 켜듯 떨떠름했던 생각들과 삶의 얼룩을 헹구는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동안 손돌바람 속 같던 가족의 대화가 호미로 캐내는 봄날처럼 밤늦도록 이어졌다. 밤새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눈은 어지럽혀진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폭설 주의보로 인해 바람조차 들어오지 못한 고요한 산속 아침, 여섯 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길을 만들며 걸어간다. 주먹만 한 눈사람을 만들어 조랑조랑 창틀에 얹어 놓고 남편 양편에서 걷는 아이들 모습이 가오리연의 갈개발처럼 팔랑거린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행복한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여행 둘째 날, 설악산이 마주 보이는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밤새 먼바다에서부터 파도에 떠밀려온 바람은 제 성에 못 이겨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널을 뛰었다. 꼭 여민 창문 틈을 비집고 분풀이하듯 흔들어대던 바람. 어둠 속에 붉은 문장 하나 지상으로 밀어 올리고 잠잠해졌다. 바다의 속살에 눈이 부시다. 바다를 빗질하며 심해의 방언을 중얼대는 바람 때문에 뒤척이느라 눈에는 잠이 묻었지만, 가족 모두 덧니 들어내고 웃는 풀꽃 같은 얼굴에 나는 가슴 가득 행복에 젖어본다.

언제부턴가 내 뜻과 다르다 하여 일방적 불통을 키워온 내 얼마른 가시가 가족이 탄 배의 밑창에 구멍을 키워가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처럼 함께한 가족여행에서 나와 남편 사이에 놓여 있던 높은 벽이 조금씩 낮아져 서로의 눈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 위로 그물에서 풀려난 물고기처럼 아들과 딸의 난해한 언어들이 퍼덕거렸다.

갈매기는 달려드는 바람 속을 저리 고요히 앉아있을까. 짧은 다리 깃털에 묻고 파도에 거세당한 갯바위의 생각을 읽고 있는 건 아닐까. 밀물에 실려 온 찬 바람이 내 머릿속을 헹구고 지나간다. 속초의 겨울 바다에서 가족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는 밑줄 하나를 긋는다.

슬며시 내 손을 잡고 코트 호주머니 속에 넣는 남편의 손, 따뜻하다.

울컥.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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