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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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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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주 시조 시인
오은주 시조 시인

동안거에 들어갔다. 의도하지도 계획에도 없던 일이 어느 날 나에게도 다가왔다. 목이 따갑고 감기 기운이 있어 며칠 동안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검사했더니 코로나 양성 진단이 나왔다. 온몸이 아팠고 나는 하나의 바이러스로 존재했다. 약을 받아 들고 집으로 와서 예기치 못한 내 삶의 겨울을 맞이하였다.

일상이 마비되었다. 아내도, 엄마 역할도 할 수 없고 직장도 일주일 휴원 하였다. 바이러스는 점점 나를 갉아먹었고 나는 먹기 싫은 밥을 숙제처럼 떠 넣고 약을 털어 넣었다. 4~5일 동안 방바닥에서 등을 뗄 수 없었고 나를 삼켜버릴 듯 기침은 괴로움에 시달리게 했다. 5일쯤 지나자 조금씩 시야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미각과 후각이 정상적이지 않았지만, 나의 몸은 서서히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또 내일의 날개를 준비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꼈다.

대한이 지나고 오랜만에 산책길에 나선다. 새해를 시작할 때 세운 많은 계획 중 나는 얼마나 실천했으며 행여 계획만 무성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며 천천히 걷는다. 꽁꽁 언 얼음 밑으로 재잘거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이런 날이면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선물처럼 감사하다. 발길에 차이는 마른 구절초와 코스모스 그리고 들풀. 이들은 바람과 햇살이 선물해 준 꽃잎과 씨앗을 지상에 다 내려놓은 채 우주의 섭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욕심부리지 않고 다음 명령어를 기다리는 듯 숙연하다.

강가에 앉아 놀던 새들은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고 강은 깊은 침묵처럼 얼어붙어 있지만, 갈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안간힘으로 바닥을 붙잡고 있다. 그 아래로 흐르는 물속에는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으리라. 우리의 삶도 누구든 겨울 강 같은 삶이 없었을까? 눈보라 비바람도 온몸으로 견뎌내는 저 강물처럼 내 삶도 고요히 흐르길 바란다. 오늘의 빙하기는 내일을 맞이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니.

길가 가로수도 생각에 잠겨 봄 눈을 틔우는 중이다. 옷을 다 벗은 나무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빗물을 마시며 태풍에 팔 하나 뚝, 부러져도 담담하게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그저 말 없는 성자처럼 하늘을 향해 서 있다. 나무는 가지들이 자양분을 다 빼앗아 가 잎을 키우고 열매를 달고 낙엽이 되어 떨어져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뿐 한 톨의 열매도 욕심내지 않는다. 다만 순리대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온몸으로 들려주는 나무의 경전에 귀를 기울여보면 속 좁은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보인다. 누가 감히, 겨울나무 앞에서 희생이라는 말을 뱉을 수 있을까. 눈보라 속에서도 봄을 준비하는 나무의 노래가 푸르고 존귀하다.


강변을 돌아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황룡사지가 나온다.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생각이 깊어질 때면 이곳을 자주 찾는다. 사계절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무엇보다 다 비우고 묵상에 든 겨울 빈터는 황룡사지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 하얀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먼 그리움 하나 소환해 떠올려봐도 좋은 곳이다.

넓은 빈터를 걸으면 황룡사 9층 목탑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말하듯 여기저기 초석들이 증인처럼 앉아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쓰는 중일까? 상상에 잠겨 본다. 아무런 말이 없다. 묵상에 잠겨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사방이 적요하다.

인도의 국부라 불리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의하면 “깊은 말씀은 침묵에서 온다”라고 했다. 겨울이면 온 세상은 침묵에 잠겨있는 듯하다. 산과 강 나무와 꽃들도 저마다 깊은 사유에 잠겨 경건하다. 다가올 새봄은 어떤 모습으로 자기만의 색과 소리와 향기로 맞이할 것인가? 그들의 날갯짓이 벌써 기대된다.

걷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천천히 제 길을 열어가는 강물을 본다. 끊임없이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는 이치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쉬지 않고 봄의 새싹을 준비하는 자연이 스승 같다. 잠시 움츠려 있었지만 나 또한 내일을 준비하며 끊임없이 걸어가리라.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처럼. 그리고 꽃눈처럼.

오은주 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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