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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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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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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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꽃이 폈다. 크고 작은 하얀 꽃이 몽글몽글 탱자꽃처럼 환하게. 장맛이 좋아지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맛있게 숙성되기를 바라면서 정월 손 없는 날에 장을 담그시던 친정어머니를 흉내 내어 된장을 담았다. 달기로 치면 엿보다 더한 것도 없겠지만, 세상 온갖 단것을 욕심껏 다 담고 싶은 마음이다.

된장은 발효식품이라 항암 작용에 효능이 있고,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도 크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에 잘 맞는 전통 음식이며, 물처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항아리 속에 가족의 건강을 지켜주는 된장이 익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손길이 가고 귀하게 느껴진다.

이른 아침부터 옥상을 오르내리는 나의 발걸음은 설렘과 기대에 차 어느새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오늘 같은 날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활동적인 엘리트 여성보다는 알뜰하고 다소곳하게 가정일에 정성을 다하는 주부이고 싶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살가운 엄마가 되고, 남편에게도 좋은 아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가슴 가득하다.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햇살 잘 드는 옥상 한 곳에 된장 항아리를 마련하고 나니 아직 장이 곰삭기도 전에 부자인 듯 마음이 뿌듯하다. 우리 재래 음식인 된장은, 남정네들이 일 년에 한 번씩 한 해 농사를 거둬들이듯이, 여인네들이 한 해 동안 가족 건강을 식탁에 올릴 것을 생각하며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음식이 아닐까 싶다.

하얀 장 꽃처럼 흰색은 모든 가능성의 시작을 뜻하며 정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해주는 컬러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추구하는 삶의 색깔은 화려하거나 현란한 색이 아니다. 품위 있고, 격조 높은 나만의 색을 연출해내고 싶다. 그 열쇠는 언제나 나에게 있을 것이다.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된장처럼, 나 또한 마음이 향기로운 깊은 사람으로 익어가고 싶다.

깨끗이 씻은 하얀 행주를 꼭 짜서 옥상으로 간다. 때 묻은 마음의 찌꺼기를 닦아내듯 된장 항아리들을 닦는다. 올망졸망 소담스러운 항아리를 행주질하며 가족의 건강과 행복도 기원해 본다. 정갈한 마음으로 된장 항아리들을 대하며 그동안 장맛보다 뚝배기에 치중하며 살지 않았는지, 가만히 되돌아보기도 한다.

장독은 자신을 휘감았던 한겨울의 칼바람과 켜켜이 쌓인 하얀 눈, 햇살에 손을 델듯한 한여름의 태양열도 온몸으로 이겨낸다. 오직 독 안의 장이 부패하지 않고 서로 어우러져 맛있게 발효할 수 있도록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다. 또~옥 또~옥 비가 내리면 빗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 새소리를 항아리 안에 담는다. 밤이면 달빛과 별빛도 함께 버무려 자신의 맛과 향을 가꾸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독 안의 메주는 하얗게 발효된 꽃잎을 방울방울 피운다. 마치 나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던 부모님처럼 장독은 장을 감싼다.

어머니가 선산인 토함산으로 가신 지 이십여 년이 되었다. 생전에 다 못한 효도가 내내 마음에 걸려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리움과 죄스러움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오늘 저녁에는 진하게 우려낸 멸칫국물에 감자, 양파, 호박을 넣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여 밥상을 차려야겠다. 남편과 아이들의 입속에 행복을 가득 넣어주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아마 어머니도 그 옛날에 나를 보며 이런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더욱 짠해진다.

꽃차를 만들 때 수분을 모두 제거한 후 자신의 향을 몸속에 품는 시간을 행매김이라고 한다. 향을 온몸에 품은 꽃은 찻잔 속에서 자신만의 향기와 색을 뿜어낸다. 이처럼 꽃차에 향매김 이라는 시간이 있는 것처럼 장에도 장 꽃이 피는 것은 숙성의 시간을 갖는 의미일 것이다. 장 꽃이 피면 간장과 메주를 분리하여 항아리에 따로 담아 오랜 시간을 가지면 맛있게 숙성된다. 마침내 된장은 뚝배기에서 맛있게 자신을 우려낸다.

어느새 나의 머리에도 하얀 꽃이 핀다. 지나온 날들, 온갖 기쁨과 아픔의 일들이 흑백필름처럼 스친다. 이 또한 내 인생이 좀 더 깊어지는 시간을 갖는 데 꼭 필요한 소재들이었으리라 스스로 토닥인다. 눈물을 쏙 빼는 고통도 새콤달콤한 순간도 한데 어우러져 삶의 농익은 참맛을 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위무해 본다. 아픔도 내 삶의 상처 난 사랑이었음을 이 나이가 되고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시대가 바뀌고 현대 문명이 빠르게 발달한다 해도 우리 민족의 가슴에 어머니는 된장의 향기로 남을 것이다. 할머니의 할머니, 어머니, 나 이렇게 세대를 거쳐 내려와도 부정하지 않고, 진정한 된장의 맛을 찾아 닮아가려 하는 것처럼. 두 아이의 가슴에 나도 된장 향기 가득한 어머니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구수한 그리움으로.

오은주 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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