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사 아흔아홉 돌계단에 숨은 뜻은
  • 모용복국장
보경사 아흔아홉 돌계단에 숨은 뜻은
  • 모용복국장
  • 승인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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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문화재 보유한 보경사
동해안서 가장 이름난 천년 고찰
절담장 뒤쪽 울창한 솔숲 중턱에
고려때 고승 원진국사 부도 있어
승탑 층수와 돌계단 합은 ‘108’
절 아름다운 건축 감상도 좋지만
경내 벗어나 탐색하는 재미 있어
보경사 뒤쪽 산 중턱에 서 있는 원진국사 승탑. 탑 층수의 합이 아홉이다.
원진국사 승탑으로 오르는 산길에 놓인 돌계단. 계단의 합이 총 아흔아홉 개이다.

아흔아홉 계단. 혹시나 잘못 세었나 해서 다시 왕복해가며 세어 보았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백팔 계단을 기대하며 승탑 돌계단을 올랐기에 아쉬움이 일었다. 그래도 절 뒤쪽 승탑으로 가는 돌계단에 서면 절 전경(全景)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절 풍모를 감상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는 천년 고찰 보경사.

1400여 년 전 신라 진평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한 이 절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내연산을 뒤에 두고 안으로는 유서 깊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이름난 고찰(古刹)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절 뒤편으로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솔숲이 있어 비록 속인(俗人)일지라도 명상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대웅전 오른쪽을 돌아드니 보물인 원진국사비(碑)를 비롯해 팔상전, 산령각, 원진각, 명부전 등 전각들이 즐비하다. 왼쪽 담장 사이로 난 쪽문을 지나 산길로 향했다. 고려 중기 때 고승인 원진국사(1172~1221) 승탑을 보러 가는 길이다. 하늘로 뻗은 키 큰 솔숲 사이를 지나니 내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가파른 산길에 돌계단이 놓여 있었다. “난 계단을 오르내릴 때 세는 버릇이 있어. 그러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생각이 없어지거든.” 언젠가 선배 기자가 한 말이 떠올라 그를 흉내 내어 계단을 세며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아흔아홉”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 참으며 마지막 돌계단을 세었을 때 실망감이 들었다. “무슨 유행가 제목도 아니고 하필 99라니, 차라리 100이었으면 좀 낫지 않을까.”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내려갔다 올라오길 반복하며 연거푸 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엉뚱한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승탑은 예상 외로 컸다. 5m에 가까운 돌기둥이 산 중턱에 서 있으니 더욱 크게 보였다. 길다란 8각형 몸돌이 부도 전체를 더 크고 길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승탑은 불교에서 덕이 높은 스님을 화장한 후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탑이다. 이곳 보경사 승탑은 고려 고종 때 입적한 원진국사 사리를 모셔 둔 사리탑이다. 원진국사는 고려 중기 때 승려로 51세에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보경사를 중창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승탑은 기단부(하대석), 탑신(중대석), 상륜부(지붕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탑을 찬찬히 살펴보며 건축미에 빠져 있는 동안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탑이 지대석(地臺石)을 포함해 아홉 층계로 이뤄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승탑에 오르는 돌계단과 더하면 정확히 ‘108’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 보경사를 찾거든 꼭 이 곳에 들러 한 번 살펴보길, 그리고 필자의 계산법에 착오가 있거든 알려주길 당부드린다.

보경사 스님들이나 건축업자가 이를 염두에 두고 돌계단을 축조했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굳이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어쩌면 필자의 쓸데없는 망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탑을 뒤로 하고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백팔 번뇌는 아닐지라도 한두 가지 번뇌는 체증이 내려가듯 소화된 것 같아 기분이 가벼웠다.

보경사는 그 자체로도 훌륭하다. 많은 보물과 유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서 깊은 전각들이 즐비해 감상하기에 손색이 없다.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피에 취하고 속인들은 아름다운 건축미에 취한다. 그리고 필자처럼 가끔은 경내를 벗어나 엉뚱한 탐색을 해보는 재미도 좋으리라. 부처님의 그 깊고 넓은 뜻이야 범인(凡人)이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마는 어쩌면 돌계단을 오르다 문득 한소식 얻을 지도 모를 일 아닌가.

모용복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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