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원의 피바람
  • 뉴스1
보현원의 피바람
  • 뉴스1
  • 승인 2023.0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칼럼

1170년 10월11일, 해가 저물어 어스름해질 무렵, 경기도 장단현 보현원의 저택 대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고려의 왕 의종이 보현원에 행차해서 숙소에 막 도착했다. 왕은 마루 위로 올라가고, 수행한 신하들은 편히 쉬시라고 인사를 하고 막 물려나려는 참이었다.

문 앞에는 짐을 내리는 하인, 어전에서 물러나와 자기 숙소로 가려는 관리들, 그들이 탈 말을 끌고 오는 마부들로 혼잡했다. 그때 숙소를 경비할 경비대가 지휘관의 인솔 하에 저택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를 굳이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호위대 전체가 반기를 든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문을 향해 달려들었고 거침없이 창과 칼을 휘둘렀다.

반군은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내고, 현재의 군모에 해당하는 머리에 쓴 두건을 벗은 것으로 표식을 삼았다. 문신, 하인을 불문하고 그 표식이 없는 자는 무신도 용서없이 모조리 살해했다. 왕은 반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이 보현원의 난, 혹은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무신정변이다. 이때부터 고려 중기를 장식하고, 조선시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된다.

무신난의 원인에 대한 통설적인 설명은 문신들이 무신을 업신여기고 박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무신과 병사들은 추운 밤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경비를 서는데, 문신들은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파티에 지쳐서 따뜻한 방에서 잠들어 있다. 무신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반란의 주동자인 이의방, 이고가 병사들에 이런 말을 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모두가 잠든 밤에 경비를 서는 건 무신의 직분이다. 열대야 때를 제외하면 밤은 춥고, 배는 고파진다. 조선시대에는 무신정권의 교훈을 잊지 말하야 한다고 늘 떠들었지만, 장병들의 복지는 나아진 게 없었다. 남한산성 성벽을 따라 가다 보면 군데군데 작은 건물지들이 있다. 장교들을 위한 공간인지, 병사들도 쉴 수 있게 지은 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도 난방시설은 없었다. 성벽에서 근무하는 군관들을 위해서 아주 작은 방 하나 규모의 온돌을 마련한 것은 수원 화성이 최초이다. 그나마 초소 모두가 온돌 시설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야간 경계근무에 나선 병사들이 핫팩을 몸에 붙이고, 보온성 좋은 내의와 파카로 무장하게 된 건 최 근래의 일이다. 그렇게 해도 병사들은 춥고 배고프다.

병사들이 춥고 배고픈 건 당연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춥고 배고픔이 원인이었다면 무신정변은 조선시대에도 수도 없이 발생했어야 한다. 막 반란을 일으킬 때는 감정적인 불만이 폭발했고, 폭발시켜야 했겠지만, 이런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본연적인 욕구의 폭발이거나 반란과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동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면 이런 해석이 왜 널리 퍼졌을까? 첫 번째 이유는 조선시대 문신들이 필요할 때마다 끌어 썼기 때문이다. 무신들의 대우를 잘 해줘야 한다거나, 자긍심을 높여줄 정책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보현원 사건을 예로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무신들의 대우가 나아졌는가? 학자들은 반대라고 말한다. 말은 늘 그렇게 하는데, 정작 제도나 처우를 보면 문무차별은 고려시대보다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문신들이 곧잘 보현원 사건을 끌어대는 건 더 교묘해진 차별을 감추려는 의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조선의 국가제도를 만든 설계자들, 최상위의 운영자들은 무신정권이 발생한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고, 재발 방지책을 다방면으로 짜 놓았다. 하지만 이 내용과 방법을 굳이 공개하고 교육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것도 정변 방지책의 하나였다.

무신정변을 야기한 실제적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장기적인 전쟁과 군부의 세력확대이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외침에 시달렸다. 거란의 침공, 여진전쟁을 겪으면서 국가는 총력전을 펼쳐야 했고, 거국적으로 군대를 양성하다 보니 신분, 지역의 차별을 깨트려야 했다. 전쟁은 참혹한 것이어서 전쟁이 역사에 미치는 순기능이라고 말하기는 참 미안하지만, 전쟁이 신분 불문, 능력본위의 인재등용이란 기회를 주는 건 사실이다. 이건 우리 역사 뿐 아니라 세계사에 공통적인 현상이다. 초야에서 영웅이 탄생하고, 기존의 좁은 신분제나 특정 지역의 독점적 특권이 깨어진다. 병사, 민중의 권리도 상승한다. 전쟁이란 목숨을 내 놓는 헌신이기에 참전자들에게 정치적 권리, 시민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기록은 무신들의 감정적인 분노는 부각하면서 교묘하게 이런 이야기는 최대한 숨긴다. 하지만 조치와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란의 시대에 하위신분층, 지방세력들이 군을 통해 일정하게 신분상승을 했고, 관료군에서도 중간층이 확대되었다.

고려 정부의 실수는 이런 신진세력을 마지못해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들을 무반직, 무신집안으로 몰아넣고 그들끼리 혼인하고, 특권을 나누게 함으로서 이들을 세력화시켰다는 것이다.

군사제도라는 측면에서 기능적인 실수도 있다. 한마디로 군벌화다. 고려시대 군대는 지역단위로 모집되었다. 민사조직과 군사조직이 동기화되어 있었다. 전시동원체제가 되면 지역의 향리가 그대로 장교가 되고, 지방민이 함께 병사가 되었다. 물논 사령관과 주요 지휘관은 중앙에서 파견했다.

지방단위가 아니라 전국에서 선발한 장교와 병사로 편제하는 상급부대도 있었다. 하지만 전시에 총력동원 체제가 되자 이런 지역군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런 군대의 장점은 동원이 쉽고 빠르고, 잘 싸운다는 것이다.

지역 향리가 지휘관이 되니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안다. 전쟁에서는 중하급 장교, 부사관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들의 선발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분명히 병사들이 추천하고, 지휘관도 잘 아는 검증된 인물로 채웠을 것이다. 전쟁은 무술 시합이 아니라 팀워크이다. 함께 뭉쳐 전진하고 함께 버텨야 한다. 같은 지역, 친구들로 결성된 군대는 이런 단합력 측면에서 아주 강하다. 겁쟁이가 도망을 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갔다가는 큰 봉변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함께 싸우고 함께 고난을 견딘다.

몽골의 침입 때 고려군이 거둔 유명한 승리가 박서 장군이 지휘한 귀주성 전투(1231)이다. 박서는 경기도 죽주(현재의 죽산) 출신으로 휘하에 지역민 출신 장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귀주 전투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죽주 병사들이 다시 한번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타향이 아니라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1235년 몽골의 3차 침공 때 몽골군이 죽주로 밀어닥쳤다. 박서는 은퇴했고 박서의 부장이었던 송문주가 죽주산성에서 역전의 용사들을 지휘하여 몽골군을 격퇴했다. 죽주산성 전투도 몽골 전쟁사에서 두드러진 빛나는 승리이다.

이처럼 전투력은 좋은데, 전쟁이 길어지면 쉽게 군벌화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것은 정부에 치명적인 고민을 제공한다. 외침을 막자니 군벌화가 두렵고, 군벌화를 방지하자니 나라와 왕조가 위험해 진다. 이 중간의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군벌이 반란을 일으키면 왕이나 왕조가 위태롭지만, 외적이 침공해도 왕조가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에 덧붙여서 나라는 초토화하고 백성들이 죽어 나간다. 국가와 왕, 권력의 조건이 국토와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라면 정변의 위험이 있다고 군대를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바로 이 중요한 부분에서 조선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군벌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말 다양한 조치를 취하는데, 결정적으로 군벌화 방지를 위해 군대의 전투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심하게 말하면 군대를 군대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군사제도를 비판할 때 이런 사례를 많이 든다.

군대가 훈련은 하지 않고 지휘관들이 수렵이나 해산물 채취 등 사역만 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이익을 착복했다. 이는 흔한 현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지휘관, 양반층이 군대를 망친 것 같다. 그 전에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군벌화를 방지한다고 병사를 잡다하게 섞는다. 지역단위로 징발한 군대도 온갖 병종을 뒤섞어서 제대로 된 훈련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현재도 기갑병과 통신병, 소총병, 행정병, 공군 조종사를 연병장에 모아 놓으면 함께 할 수 있는 훈련이 무얼까? 제식훈련과 소집점검, 거리 청소 밖에 할 일이 없다. 내부적으로 이렇게 행동하면서, 대중들에는 무신을 무시해서, 술 취해서 무신을 능욕해서, 춥고 배고프게 만들어서 무신의 난 같은 불상사가 발생했다고 가르쳤다. 군의 대우는 당연히 개선해야 한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