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내림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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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 내림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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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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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간판을 약국이라 우겨 아들을 기함하게 한다. 병원 정문에 비켜 걸린 열십자 표식은 당연히 약국일 것이라 여겼고, 또 그렇게 보았다. 대학병원에는 하나쯤 꼭 있기 마련이기에 다시 돌아가 보자는 아들의 말에 내가 본 게 맞을 것이라 자신했다. 좀 전까지 ‘약국’이라고 보았던 글자가 네온사인 불빛 선명하게 ‘동국대학교 병원 입구’라 쓰고 나를 민망하게 하려는 듯 천천히 또박또박 흐른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부두에 들어와 닻을 내리고 정박하게 되면 배는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이나 사고도 처음 제시된 기억이나 이미지에 고정되어 어떤 판단도 그 영향을 받아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지 않게 되는 것을 닻 내림 효과라 일컫는다. 언제부턴지 내 머릿속에도 오래되고 낡은 배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좀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말에 ‘색안경을 끼고 본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기의 주관이나 선입견에 얽매여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미리 좋지 않게 본다는 의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미리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은 때론 올바른 인식을 방해할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고정관념과 경험에 의한 선입견이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여 낭패를 보기도 한다. 어쩌다 남녀 사이에 폭행 시비가 생기면 남성을 가해자로 여성은 피해자로 당연시하는 것도 마음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 때문이다. 입성이 꾀죄죄하고 헙수룩한 사람은 미리 가세가 빈한할 것이라 짐작하여 여기는 것 역시 색안경을 끼고 본 연유일 것이다.

요즈음 일부 기업에서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도 하고, 블라인드테스트로 새로운 제품을 평가하기도 한다. 직원 채용에 명문대 출신의 고학력 엘리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출신 지역이나 학력 등 대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실력 있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함일 것이다. 제품평가에서도 제조사나 브랜드를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소비자가 제품을 먼저 사용해보고 품질을 감정하도록 하는 것인데 소비자의 평가와 선택에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극 중 인물이나 전개되는 줄거리가 뻔해 긴장감은 물론이고 감흥이 없을 때가 있다. 등장인물의 차림새로 지위를 판단하게 하는 데에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하다는 고정관념은 여주인공을 화초 같은 인물로 설정하고, 남자에게 기대 신분 상승하는 성 차별적이고 고리타분한 전개로 답답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낯설게 하기’는 문학에도 있지만, 연극의 연출기법에도 있다. 일상적으로 보았던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이도록 연출하는 것이다. 익숙한 생각과 관습, 편견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사고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진실을 더 잘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기법이다.

아들이 유치원생일 때 그린 자동차 그림이 현실이 되었다. 삼십여 년 전 내가 생각한 하늘을 날 수 있는 건 비행기와 새, 잠자리가 전부였다. 지붕에 프로펠러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그림은 다소 생뚱맞고 재밌는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의 드론과 흡사하다. 구태의연하게 붙박인 일반화된 고정관념의 불변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사유하고, 그 생각이 유동적으로 흐를 때 세상을 바꾸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초창기 화풍은 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문제를 묘사하며 어두운 채색으로 비참한 주제가 특징이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고흐는 기존의 학문적 전통과 사실주의의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빛과 움직임의 감정을 담아 선명한 색채의 화풍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상파의 대가가 되었다.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로 나가면서 ‘해바라기’, ‘포룸 광장의 카페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을 그렸다. 검게만 표현되던 기존의 밤하늘을 단색의 파란색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황금빛 별이 대조를 이루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기존 화풍을 고수하는 많은 사람의 비난과 무관심에도 틀을 깨는 새로운 사조思潮를 받아들였고, 그는 여러 걸작과 함께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한집에 사는 아들과 나는 가끔 갈등을 겪기도 한다. 아들이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볼 때면 한창 성장기에 한밤중까지 게임과 만화에 빠져 성적이 뒷걸음치던 때가 생각나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오락실이나 만화방은 불건전하다는 고정관념과 게임이나 만화의 폭력성이 인성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편견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고착된 사고와 선입견으로 자식의 머릿속 생각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은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유망한 사업이고 사회, 문화, 역사 등 교육프로그램에 접목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애써 변화를 모른 체하고 닻 내리고 정박한 배처럼 구시대의 꼰대로 남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닌지 열린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핑크빛 노을이다. 서산 너머로 길게 누운 노을은 내가 여태 본 적이 없는 황홀한 광경을 펼쳐놓았다. 저녁놀은 붉거나 오렌지빛이라고 생각한 나의 포박된 고정관념은 매직아워의 핑크빛 노을에 여지없이 깨어진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늙은 강 따라 벼랑을 움켜쥐고 백열등이 하나둘 눈을 뜬다. 초저녁의 사운 대는 바람은 물이랑을 경작하고 붉은 수다를 속살거린다.

다시 출항이다. 오랜 낮과 밤이 침잠된 닻을 올린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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