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예고’는 우리사회의 초상(肖像)
  • 모용복국장
‘살인 예고’는 우리사회의 초상(肖像)
  • 모용복국장
  • 승인 2023.08.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림역 ‘묻지마 흉기난동’ 이후
전국서 ‘살인 예고’ 글 잇따라
50여건 적발·46명 검거해 조사
중학생 등 미성년자 다수 포함

학업·취업·빈곤·경제양극화 등
다양한 요인이 중첩된 결과물
법 집행의 불공정도 원인 지목
‘살인 예고’는 우리사회 자화상

‘묻지마 칼부림’ 사건에 이어 ‘살인 예고’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달 서울 신림역에서 조선(33)은 백주대낮에 일면식도 없는 행인 4명을 상대로 무차별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조 씨는 경찰 진단검사 결과 사이코패스로 분류됐다. 지난 3일 경기도 분당구 서현역 인근에서는 20대 최모 씨가 무차별 흉기난동을 벌여 1명을 숨지게 하고 1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경찰이 확인한 병원 기록에 따르면 최 씨는 2015년~2020년 2개 병원에서 지속해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으며 약을 처방받아 복용했다. 이어 2020년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 진단을 받았으며, 이후 최근 3년간은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묻지마 범죄’를 예고하는 글이 잇따르고 있어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6일까지 온라인을 통해 올라온 ‘살인 예고’ 글은 50건에 달한다. 경찰은 이날까지 ‘살인 예고’ 글을 쓴 46명을 붙잡아 범행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으며, 미성년자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묻지마 범죄’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증오 범죄여서 피해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개인적인 불만이나 실패의 원인을 사회 전체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전가해 범죄를 합리화한다. 그런 면에서 경제 불황이 크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극단적 형태의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 갖추어진다. 현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실업율의 증가, 빈곤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대인관계에 실패를 계속한 나머지 판단력과 도덕적 판단을 상실하거나 자신에게 닥친 실패를 사회 전체의 탓으로 돌리고 피해자를 비인격화 해 자신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신림역·서현역 사건 이후 이를 흉내낸 살인 예고 글이 잇따르고 있는 현상은 가볍게 넘길 일이 결코 아니다. 이는 개인적인 범죄를 넘어 우리 사회가 심각한 중병에 걸렸음을 방증한다.

살인 예고 글을 올리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자기과시형’이다.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평소 글을 올려도 사람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살인 예고 같은 글에는 뜨거운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거기에 우쭐해 하고 마치 자신이 엄청난 힘을 가진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실제 이번에 검거된 살인 예고 글 작성자들 가운데도 이러한 경우가 많았다.

충남경찰청은 5일 오전 2시24분쯤 칼 형상을 한 사진과 함께 천안시 서북구 두정동에서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예고 글을 작성해 올린 고교생을 붙잡았다. 조사 결과 이 학생은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고 있던 중 장난 삼아 글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청주에서는 칼부림 예고글을 조작해 유포한 30대 남성이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친구들에게 장난으로 보낸 글이 이렇게 퍼져나갈 줄 몰랐다”고 말했다. 전남에서도 흉기 범행 예고 글을 올린 3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전날 낮 12시 9분쯤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점심 먹고 식칼 들고 나주 간다”라는 글을 작성했으며 경찰 조사에서 “장난삼아 글을 올렸다”고 진술했다.

경기 하남시 미사역 일대에서 살인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내용의 온라인 게시물을 쓴 사람은 중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전날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토요일 12시에 미사역 시계탑 앞에서 다 죽여줄게’라는 글을 올렸다. 경찰은 신고 접수 2시간여 만에 미사역 인근의 한 피시방에 있던 중학생을 붙잡았다. 이 학생은 경찰 조사에서 “사람들이 흉기 난동을 보고 많이 놀라니까, 실제로 사람을 살해할 마음은 없었고 심심해서 장난으로 게시했다”고 진술했다.

다음으로 ‘불만표출형’이다. 평소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이 최근 벌어지는 이슈에 편승해 불만을 표출하는 글을 올리는 경우다. 여기에는 신림역·분당역 흉기난동처럼 사회적인 불만이 극에 달하거나 정신적인 질환으로 인해 실제로 범죄로 연결될 수도 있고, 단순히 자기 글에 대한 파장이나 반응을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행동의 유무를 떠나 조선과 같은 사회적 불만세력이 우리사회에 상당히 잠복돼 있음을 나타낸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묻지마 범죄’에 이은 ‘살인 예고’ 현상이 잇달아 벌어지는 이유는 그 연령만큼이나 다양한 요인이 중첩된 복합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학업이나 취업 스트레스, 경제적 빈곤, 빈익빈 부익부 계층 차이로 인한 불만이 분노와 반항심으로 이어져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법의 불공정·불평등과 느슨한 법 집행도 원인으로 제기된다.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부르짖은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정치인들의 가족은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미꾸라지처럼 잘만 빠져 나가고, 재벌은 천문학적인 경제범죄를 저지르고도 금세 얼굴을 드러낸다. 반면 일반 국민들은 사소한 범죄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또 천인공노할 강력범죄를 저지르고도 가해자들은 두 발을 뻗고 살아가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평생을 고통에 떨며 죽음보다 못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살인 예고’ 글로 국민 불안감이 고조되자 경찰이 사상 처음으로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하는 등 강력 단속에 나선 상황이어서 조만간 사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사회에 내재된 불평등, 불합리, 부조리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불만세력은 언제 어디서든 다시 고개를 들게 될 것이다. ‘살인 예고’는 현재 우리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모용복 편집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