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 특유의 의리·뚝심·선비정신으로 독립운동 이끌다
  • 김희동기자
경북인 특유의 의리·뚝심·선비정신으로 독립운동 이끌다
  • 김희동기자
  • 승인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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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14개 군현서 을미·병신의병, 3월 도내 유생 김산의진 결성
의병항쟁, 계몽운동, 3·1운동, 국외망명, 사회운동 등 다양한 투쟁 앞장

문경, 이강년 의병 전투지인 고모산성·일본서 의열투쟁 펼친 박열 생가 등
영양,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생가·청송엔 화목장터 만세시위 현장 자리
-대구경북 독립운동의 역사를 찾아서-
사적지를 통해 보는 독립운동 활동의 흔적
 
당시 22세로 키가 180cm인 현준석 지사가 1943년 일본군 징집을 앞두고 입대를 축하하는 솔가지로 만든 문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22세로 키가 180cm인 현준석 지사가 1943년 일본군 징집을 앞두고 입대를 축하하는 솔가지로 만든 문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경북의 의병들, 다시 일어나다

한국사에서 의병은 국가와 민족이 위급할 때마다 일어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일어난 임란의병과 일제의 무력 침략에 반대해 일어난 한말의병이다.

외세의 침략에 대응해 백성들이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전개한 무력 투쟁이다. 경북인들은 의병항쟁·계몽운동(국채보상운동)·의열투쟁·31운동·국외망명·사회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경북도의 을미·병신의병은 1896년 1월부터 안동·청송·진보·영양·영덕·영해·영천·예안·봉화·순흥·풍기·용궁·예천 등 14개 군현에서 의병진이 결성된다. 그리고 1896년 3월 상주·김산·개령·지레·성주·선산 등의 유생들이 연합하여 김산의진을 결성했다. 김산의진은 처음 창의에 실패한 뒤 안동의진과 진주의진의 독려에 자극을 받은 김산 등지의 유생들이 창의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는 을사의병이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며 2년 뒤인 1907년의 군대 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이 합류한 정미의병으로 그 세력이 더욱 커진다.

경북북부 보훈지청 관할로 안동· 예천· 영주· 봉화· 청송· 의성· 문경· 영양 등 8개 지역이 있다.


▲문경

이강년 의병 지도
이강년 의병 지도

 

1896년부터 문경·제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강년(1858-1908)이 거주했던 ‘이강년 집’이 있으며 1896년 이강년이 이끄는 50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투를 벌인 ‘이강년 의병 전투지- 마고성’과 ‘이강년 기념관이 있다.

 

 

 

운강 이강년 기념관.
운강 이강년 기념관.

소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여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전투 중 부상으로 인해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9월에 교수형을 선고받고 10월에 처형됐다.

<운강문집>, <운강선생창의일록>의 저서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이강년 선생에게 수여했다.

운강 이강년 선생 동상앞에서 지난 8월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운강 이강년 선생 동상앞에서 지난 8월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박열 생가 지도

 

일본에서 의열투쟁을 펼친 박열(1902-1974)이 살았던 ‘박열 집’과 ‘박열 기념관이 있다. 2017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제작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 속에 가려진 인물 ‘박열’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있다. 의병항쟁을 펼친 신태식(1864-1932)1920년대 조선독립후원의용단에서 활약한 신태식이 태어난 ‘신태식 생가’가 있다.

박열의사 생가
박열의사 생가
박열의사 기념관. 한반도의 독립유공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시인. 또한 재일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박열의사 기념관. 한반도의 독립유공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시인. 또한 재일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예천

1919년 4월 3일 용문면 주민 100여 명이 면사무소 앞 도로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인 ‘옛 용문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가 있으며 1896년 4월 9일 예천의진과 서상렬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주둔했던 ‘예천의병 주둔지- 명봉사’가 있다.

▲영주

1907년 11월 28일부터 5일 동안 민긍호·이강년부대 의병 500여 명이 일본 수비부대와 교전을 벌인 ‘이강년 의병 전투지- 죽령’가 있으며 이 전투의 양쪽 피해자는 알수 없으나 치열한 전투로 전해진다.

1919년 3월 21일 영주 장날을 이용하여 오하근·박인서 등 수백명이 3·1 만세시위를 벌인 ‘영주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가 있다. 이 두사람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들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어물전과 쌀가게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봉화

1920년 음력 11월경 권상익이 유림단 이름으로 중국 대통령과 대신들 앞으로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유림단 독립청원서 작성지- 추원재’가 있다. 1908년 5월 이강년 의병이 영천수비대와 격전을 벌인 ‘이강년 의병 전투지-서벽리’가 있다. 이 격전지는 현재 서벽초등학교 입구 ‘항일의거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당시 의병은 일본 군경의 목을 베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에 매달았다고 전한다.

나라가 망하자 1910년 10월 19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순국한 이면주가 태어난 ‘이면주 생가’가 있다. 1908년 6월 4일 이강년 의병이 대구에서 파견된 일본 군경을 맞아 전투를 벌인 ‘이강년 의병 전투지-재산’ 들판이 있다. 이 전투에서 이강년 부대는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을 격퇴했지만 의병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영양


1919년 3월 25일 영양군민 1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영양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가 있다.

1396년부터 의병항쟁을 전개했으며 1914년 자결 순국한 김도현이 태어나 살던 ‘김도현 생가’가 있다. 김도현이 쌓은 성으로 1896년 6월 10일경부터 김도현이 본진을 설치하고 의병항쟁을 전개한 ‘김도현 의병 전투지- 검산성’이 있다. 자신의 집 뒤쪽 검각산 정상에 성을 쌓고 의병을 모아 본진을 주둔시켰다. 서쪽의 경사면에는 약 200미터 가량의 길이에 토석을 성벽을 쌓았으나 지금은 무너지고 일부 석축벽만 남았다.

1896년 6월 22일 김도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던 의병 30명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정성첨 의병 순국지-사부령’이 있다.

1930년 3월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회원들이 원리 장날에 광주학생운동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문 800여장을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벌인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만세의거지- 원리장터’가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남자현 순국 90주년을 기념하는 ‘어린이 특별기획전’을 열어 지난 11일 안동대어린이집 어린이들이  체험을 하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남자현 순국 90주년을 기념하는 ‘어린이 특별기획전’을 열어 지난 11일 안동대어린이집 어린이들이 체험을 하고 있다.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남자현(1872-1933)지사가 태어나 살던 곳으로 ‘남자현 생가터’가 남아있다.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 구식 여성이지만 46세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14년 동안 독립운동 현장에서 일제에 맞서서 무장항일투쟁과 교육계몽운동, 의열투쟁을 펼쳤던 여성독립운동가였다.

▲청송

1896년 3월 12일 청송의진을 결성하고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한 ‘청송의병 결성지-청송객사’가 있으며 1896년 4월 7일 경 진보의진을 창의하고 허훈을 대장으로 추대한 ‘진보의병 창의지- 진보향교’가 있다. 1910년 서종락이 이끄는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붙잡혀 총살당한 ‘청송의병 수난지 -고와실 백석탄’이 있으며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추민 4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화목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가 있다.


#광복회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찾아서

오연근 지사의 아들인 오기환(왼쪽) 사무국장과 현준석 지사의 아들인 현낙호 회장.
오연근 지사의 아들인 오기환(왼쪽) 사무국장과 현준석 지사의 아들인 현낙호 회장.

▲광복회 경북도 현낙호 연합지회장

사진은 어떤 순간을 기록하고 그것을 영구적으로 보존하여 역사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시간적인 흐름이나 사물의 모습만을 전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주체와 대상들 간의 관계,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사진을 보는 이의 시선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지난 21일 문경보훈회관에서 흑백의 사진 몇장과 마주했다. 광복회 현낙호(71) 문경상주예천연합 지회장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많은 역사적 순간의 사진을 보았지만 처음보는 사진은 낯설었다. 훤칠한 키에 일장기를 들고 있는 남성의 눈매는 80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담담하게 서 있었다. 그 위로 일장기와 욱일기 아래 일본군 입영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를 통해 일본군 입대 장면과 독립투사들의 모습을 봐 왔기에 중요한 사진 기록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복후 젊은시절  현준석 지사의 모습.
광복후 젊은시절 현준석 지사의 모습.

입대를 하는 이는 현 지회장의 부친으로 22세의 현준석(1924-1969) 지사다. 그는 안동농업고를 졸업하고 대구사범대를 다닌 엘리트 출신이었다. 문경에서 유지의 외동아들이었지만 징집을 피할 수 없었고 1943년 일본군에 징집될 당시 한장의 사진을 남겼다.

현 지사는 중국 파견부대에 근무 중 1944년 중국 호남성해협에서 탈출했다. 일본첩자로 한국광복군에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 문경 마원리 출신으로 한국광복군이었던 김경화(1919-?)가 고향사람임을 확인해 줬다. 이후 그는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중국 중앙군 제4군 산하 유격대에서 대공작활동을 하다 같은 해 2월에는 한국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제1분대에 입대해 활동했다. 현준석 지사는 조선의용대가 속해있던 제1지대에서 활약했으며 광복이 된 후 광복군들과 함께 서울에서 환영행사를 갖고 1946년 문경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광복회 경북도 오기환 연합사무국장

오기환(72)사무국장은 오연근(1926-2007) 지사의 장남이다. 오 지사는 예천군 풍양면이 고향으로 1943년 10월 15세때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됐다. 1943년 세계2차대전 말 궁지로 몰린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횡포가 더욱 심했다. 중국 남경지구의 일본군에 배속돼 있던 중 일본군 병사들로부터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총사령부가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해 1944년 3월경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해 활동했다. 그후 1945년 1월 중국 중경에 도착해 토교대에 배속돼 복무하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조국으로 귀환해 대구에 정착했다.


도움주신분들: 문경시청 홍보전산과 황희선 주무관, 이용훈 포항광복회 지회장,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김민기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경북독립운동사 I, II(2012,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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