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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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후드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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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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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슴을 쏘다

한국에 홍길동이 있다면 영국에는 로빈 후드가 있다. 활의 명수, 셔우드 숲의 의적 로빈 후드 이야기는 영국의 대표적인 중세 전설이다. 홍길동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으로 유명해졌다.

소설의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홍길동이란 인물은 연산군 때 실존했던 도적 홍길동을 모티브로 했다. 임꺽정도 명종 때 활약한 진짜 강도였지만 어디에서부터인가 의적으로 둔갑하고, 20세기에 멋진 동료들을 거느린 소설의 주인공으로 재탄생했다.

로빈 후드의 전설도 비슷한 구조이다. 14, 15세기에 로빈 후드의 전설이 시와 소설로 문자화 되었지만, 그의 전설은 12, 13세기부터 떠돌았다. 그가 정말 실존인물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이름만이라도 실존했던 인물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다.

로빈 후드는 울창한 셔우드 숲에서 거한 리틀 존, 주먹 세고 파계승에 가까운 괴짜 승려 터크 등 다양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포악한 관리, 오만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싸운다.

로빈 후드의 모험에는 여러 저항이 포함된다. 12세기에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족에 대한 색슨족의 저항과 농민들을 착취하는 왕과 귀족, 부패한 관리에 대한 저항이다. 또 하나는 이전에는 모든 주민들이 공평하게 누리던 숲과 공유지에서 농민을 쫒아내고, 사유지화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다.

1938년 에롤 프린이 주연한 고전 영화 로빈 후드의 모험에서 로빈 후드는 숙적 노팅엄 성주의 연회장에 사냥한 사슴을 메고 등장한다.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깜짝 놀라는데, 사냥한 사슴이 셔우드 숲에서 사는 ‘왕의 사슴’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슴이 누구의 것인가? 가난한 농민은 왜 숲에 사는 사슴을 사냥할 수 없는가가 이 갈등의 핵심이자 로빈후드 이야기의 서사적 배경이다.

셔우드 숲은 맨체스터 동남쪽, 셰필드와 노팅엄 사이에 있는 무성한 자연림이다. 런던에서 영국 북부로 올라간다고 할 때, 정 중앙부를 관통하는 도로 상에 위치한 숲이다. 지금도 이 숲은 국유림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로빈 후드 시대에 셔우드 숲은 현재 면적의 20배에 달했다. 현재 면적이 424.75헥타르인데, 전성기에는 무려 7800헥타르였다.

이 거대한 숲은 과거에는 주인이 없는 농민들의 공유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숲에서 식량과 자원을 얻었다. 숲이 제공하는 가장 소중한 자원은 목재와 땔감이었지만, 식량과 다양한 자원도 숲에서 채취되었다.

농민과 가난한 노동자에게 숲은 수익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숲에서 양떼를 키웠다. 돼지는 방목이 불가능한 동물이지만, 가을이 되면 숲에 데려가 도토리를 잔뜩 먹여 살을 찌운 후에 도살했다. 돼지고기와 소시지로 이들은 겨울을 낫다.

이처럼 숲은 생존에 필요한 수많은 산물을 품고 있었고, 당연히 그것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 어느 날 왕이 이 숲을 자신의 사유지로 선포하고, 사슴만이 아니라 숲이 생산하는 모든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했다. 숲에는 가혹한 산림관리원을 두어 숲에 침입하는 자, 밀렵자를 감시하고 폭행했다.

여기에 폭정까지 더해져 세금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가난하고 굶주린 농민은 목숨을 걸고 숲에 들어가 사슴을 사냥한다. 우연히 산지기와 농민 밀렵꾼의 갈등에 휘말린 혹은 이 갈등을 알게 된 로빈은 동지와 농민들을 모아 산지기를 축출하고, 노팅엄의 영주와 싸우며, 숲을 사수한다.

로빈 후드 이야기는 영국사에서도 악명 높은 존 왕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실제로 존 왕은 숲의 사유화에 책임이 있다. 1215년 존 왕은 자신의 폭정에 항거하는 귀족들의 반발에 굴복하여 영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다. 이때 귀족들은 산림헌장이란 별도의 문서를 왕에게 내밀었는데, 이 역시 왕의 숲의 사유화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산림헌장이 숲을 농민에게 돌려주라는 것은 아니었다. 영주, 지주들도 숲에 탐욕을 부리고 있었고, 왕이 자신들이 차지할 숲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 전국의 산림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은 영국 왕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이토록 산림에 욕심을 낸 이유는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사냥이라는 여흥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숲의 산물은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지녔다. 프랑스 필립 4세의 경우, 산림에서 나는 수익이 전체 영지 수익의 1/3이었다.

◇ 공유지를 둘러싼 오랜 갈등

역사적으로 보면 숲의 사유화, 넓은 의미로 공유지의 사유화는 로빈 후드의 시대에 갑자기 자행된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6000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수메르 시대에도 공유지의 사유화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었다.

영국이나 수메르에서만 벌어진 갈등도 아니다. 전세계에서 어느 시대에나 벌어졌던 갈등이다. 앞에서 임꺽정을 진짜 강도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기분 나쁘셨던 분들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건 지배층의 시각이자 왜곡이고 진실은 폭정에 대항하는 민중의 항거, 의적이 아니겠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16세기에 황해도 지역에서는 왕실, 세가들의 간척사업과 개간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가나 저지대의 갈대밭들이 개간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이 투하되어 황무지가 농지로 바뀌면 좋을 것 같지만, 이런 갈대밭과 늪지들은 농민들에게는 연료나 생활재료 등을 공급하는 공유지 역할을 한다. 이런 공유지가 왕실과 권세가의 사유지로 바뀌면서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 혹은 생계수단이 사라진 빈민들이 임꺽정의 집단에 가담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그래서 도적 임꺽정이 아니라 임꺽정의 반란, 농민반란이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학설도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그깟 갈대밭 때문에”, “갈대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라는 식으로 말씀하는 분도 있다.

임꺽정이 ‘갈대밭의 정의’를 위한 조직투쟁가였는지, 그냥 범죄자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좀 더 인간적인 설명을 가미해서 그가 도적이 된 이유가 갈대밭의 사유화로 인해 빈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이런 부분은 로빈 후드도 마찬가지인데, 초기 전설에 등장하는 로빈은 영화에서처럼 세련되고 낭만적인 의적이 아니라 가혹 행위를 서슴치 않는 산적으로 묘사된다.

임꺽정이 혹은 로빈 후드와 관련한 소설과 영화는 그들의 행동에 정당성과 함께 절제와 합리를 불어 넣는다. 그래야 독자들이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 특히 갈등과 대립의 역사는 그렇게 합리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소설은 멋진 주인공으로 갈등조차 아름답게 처리할 수 있지만, 역사는 그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역사를 볼 때마다 역사가는 불편하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한다. 어느 쪽이 정의일까? 어떤 행동 예를 들면 공유와 사유, 어느 쪽을 선이라고 규정해야할까? 어느 쪽의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변호해야 할까? 아주 양심적인 고민같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궤도를 벗어난다. 역사가는 과거에 벌어지는 일을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양심과 정의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하며, 인류가 나아가야할 이상적 방향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행동에 대한 연구, 인간이 저질러온 일에 대한 탐구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 해야할 것 못지 않게 할 수 있는 것 또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교실에 10개의 책상을 두고 10명의 학생에게 ‘너희들이 합의해서 자리를 정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합리적으로 문제를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책상이 8개 뿐이라면 합리적 배분이 가능할까?

사실 이 비유는 틀렸다. 10명의 학생 중에 폭력배가 몇 명 섞여 있다면, 학생들을 행동을 평가하고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책상이 10개여도 아주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훌륭한 학생 구성이나 조건이 함께 한다면 8개의 책상이란 기형적 상황에서도 감동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공유와 사유의 문제도 “양과 갈대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역사는 만인 대 만인 즉 야만과 야만, 야만과 합리의 투쟁이 아니라 합리와 합리의 충돌이었다. 우리의 합리와 너희의 합리가 다른 것이 문제였다. 그 갈들의 해결책을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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