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는 ‘손돌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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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는 ‘손돌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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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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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복 편집국장
모용복 편집국장

애절한 유행가 가사가 아니라도 첫눈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한 가지씩 가지기 마련이다. 연인 사이에 첫눈 올 때 만남을 약속하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또 안타까운 이별 후에 쓸쓸이 발길을 돌리던 날도 어쩌면 첫눈이 내리는 날일 수 있다. 그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바로 오늘(22일)이다.

소설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기온이 갑자기 급강하한다. 예전 농촌에서는 농사철이 끝난 뒤 농민들이 허리를 잠시 폈다가 이 때가 되면 월동준비로 다시 일손이 분주해진다. 시래기를 엮어 처마 밑에 매달고 무말랭이나 호박을 썰어 말리며 겨우내 소에게 먹일 볏짚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올려 단단히 묶어둔다. 또 한파가 닥치기 전에 김장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대개 소설 즈음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며 날씨가 매서워진다. 소설에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 하는데, 이날 뱃사람들은 배를 띄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도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풀이 무성한 여울로 배를 몰았다. 피난길에 마음이 급해진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命)하였다.

손돌은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자신이 죽은 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가 가는 길을 따라 배를 저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이 죽은 후 물살이 거세져 위험에 처하자 왕과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향하는 방향으로 배를 저어 무사히 강화도로 피할 수 있었다. 그제야 왕은 죽임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뱃길을 일러준 손돌의 충성심과 재주에 감복해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바로 소설이었다. 그 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가워졌는데,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원혼 때문이라 생각해 이 때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불렀다. 이날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됐다고 한다.

요즘은 소설이 되기 한참 전부터 ‘손돌바람’ 못지 않은 찬바람이 불어 닥치고 날씨가 사나워지니 그만큼 억울한 원혼이 넘쳐나는 때문일까? 올해는 유독 ‘묻지마 범죄’가 많은 해였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 갔다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해꼬지를 당해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 7월 21일 신림역 칼부림 사건을 시작으로 8월 3일 서현역 칼부림 사건까지 연쇄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실제 흉기를 들고 현장까지 갔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들도 여럿 있었다. 칼부림 사건은 과거에도 꾸준히 일어나던 끔찍한 사건들이었지만 올해는 개인 간 원한 문제가 아닌 묻지마식 대량살인, 테러 같은 칼부림이 유독 많이 발생한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형 범죄로 인한 살인, 살인미수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지난 13일 수원지법에서는 수십 명의 남성들을 흉기로 찌르겠다는 내용의 ‘살인예고’ 글을 온라인에 올린 혐의로 기소된 30대 여성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이 여성은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당일인 8월 3일 오후 7시 3분쯤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 ‘서현역 금요일 한남 20명 찌르러 간다’는 글과 흉기를 든 사진을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피고인에 대해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이처럼 묻지마 흉기난동 범죄를 추종한 살인예고 글이 SNS를 통해 확산하면서 대한민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신림역 칼부림 사건 다음날인 7월 22일 원신 여름축제 테러예고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칼부림 예고글이 우후죽순으로 SNS에 올라왔다. 지난달까지 살인예고글 게시 혐의로 검거된 인원은 300여명에 달한다.

이제 더이상 대한민국은 범죄로부터 안전한 국가가 아니다. 억울한 원혼이 넘쳐나는 이곳에 1000여 년 전 불었던 손돌바람이 다시 몰아치고 있다. 첫눈은 서설(瑞雪)이라 했다. 소설 첫눈이 손돌바람을 재우고 아픈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를. 이 땅에 손돌처럼 억울하게 죽어가는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길 바라본다.

모용복 편집국장

※ 이 기사는 5년 전 필자가 쓴 ‘손돌바람’을 2023년 시대상황에 맞게 다시 작성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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