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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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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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인데 상업성이 덜해 비매품으로 펴내는 책이 있다. 필자는 이전에 자산배분과 생애자산관리 관련 책을 두 권 출판한 적이 있다. 자산배분은 예일대 기금 최고투자책임자인 데이비드 스웬슨이, 생애자산관리는 밀레브스키 교수가 저술한 것이다. 조금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책 내용이 좋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재고가 소진되다 보니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시중에 파는 책이면 돈이 얼마가 되든 사보라고 할 수 있지만 비매품이니 이들이 구입할 방법도 없다. 책 값이 비싸더라도 구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책 값에 관계 없이 살 방법이 없다. 비매품 책을 찍어 낸 사람의 자비에 의존할 수 밖이다. 이들이 책을 더 찍어주지 않으면 구입할 길은 없다. 비매품 책은 주면 받는 것이지 돈을 준다고 구입할 수 없는 일방 통로다.

사랑도 그러한 듯하다. 돈을 준다고 구입할 수 없다.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런 것이다. 자녀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지 다른 이유는 없다. 자녀가 잘하면 사랑하고 잘 못하면 내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대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느냐에 대한 응대가 아니라 그 대상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복과 은혜를 바라며 대상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대표적인 것이 신에 대한 사랑이다. 신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까지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닌다. 인간의 열심, 사랑, 헌신과 이에 대해 신이 복으로 보답을 해주는 관계이다. 정화수를 떠 놓고 찬 물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천일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기도를 하면 신이 보고 감동해서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본질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가 구약성서에 나온다. 유대인들은 앗시리아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남쪽 유다 왕국마저 바빌론에게 망한 뒤 포로로 끌려 가 70년간 이국 땅에서 살게 된다.

독일 그룹 보니 엠(Boney M)이 불러 유명해진 ‘바빌론 강(Rivers of Babylon)’이 곡은 경쾌하지만 실상은 이 때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민족에게 노예로 끌려간다는 것은 유대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가장 강한 신을 가진 백성이 어떻게 이런 치욕적인 일을 당할 수 있는 지, 신은 왜 이런 자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때 하박국이란 선지자가 신에게 따져 묻는다. 자신의 백성을 신께서 왜 이렇게 취급하느냐고. 신의 답이 엉뚱하다. 의인(義人)은 부귀나 권세가 아닌 어떤 환경에 처하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의인이 되는 게 해법인가? 하박국의 물음과 신의 답은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신의 본질을 깨닫게 된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고백하게 된다. 하박국은 야훼라는 신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고 기뻐하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코페르니쿠스적이다. 지구가 중심에 있으며 태양이 그 주위를 돈다는 관점을 가지면 지구 이외 행성들의 궤도가 그야말로 얽히고 설킨 모습이 된다. 하지만 지구 중심에서 태양 중심으로 관점을 바꾸자 태양계 행성들의 궤도가 너무 간단하게 설명되었다.

무엇을 주어서 사랑한다는 관점에서는 많은 의문들이 얽히고 설킨다. 왜 나는 어렵게 사는지, 힘든 일이 끊이지 않는지. 하지만 무엇을 주는 가와 관계 없이 존재 자체를 사랑하면 그런 모순들이 사라진다.

다만 조건이 있다. 존재를 무한히 신뢰하고 자신에게는 존재의 가치가 최고여야 한다. 연인에 대한 사랑,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이러하다.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선물을 받고 부모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냥 아빠를 사랑한다는 고백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에 대한 사랑이 디폴트로 장착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오후가 되면 가족의 관계가 자녀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변한다. 자녀가 독립하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변화를 대수롭게 보면 안 된다. 너무나도 큰 변화다. 여기에서 많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세 끼를 집에서 꼬박 챙겨 먹는다는 ‘삼식(三食)’이나 ‘집에 없는 남편이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이라는 말들이 부부 중심의 가족 구조가 되면서 생겨났다.

바로 이 때 중요한 것이 부부의 사랑이다. 사랑이라 하니 젊을 때의 열정의 불꽃을 태우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해주어서 내가 반응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신뢰하고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녀를 키우고 그리고 이렇게 둘이 우뚝 살아 남은 것만 해도 서로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인생 오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도 서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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