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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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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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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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내다보는 사각의 뙤창이다. 잠시라도 안 보이면 불안하여 눈 가는 곳, 손 닿는 곳에 둔다. 잠자리에서도 머리맡을 지킨다. 세상의 오만가지 정보를 알고 있는 데다 지인들의 안부도 때맞춰 ‘깨톡깨톡’ 일러준다. 매양 같이 놀자 보채는 사각 눈. 어떤 때엔 매콤 칼칼한 휘발성 자극으로 도파민을 과잉 분출시켜 밤을 꼴깍 지새우게도 한다.

요즘 휴대전화는 가히 만능이라 할 수 있다. 웬만한 공공기관이나 은행 업무는 굳이 직원들과 대면하지 않아도 척척 해낸다. 여러 사람과 화상으로 토론도 하고 정보 검색은 물론이고 운동기록과 건강기록을 점검하고 관리해주기도 한다. 손바닥만 한 게 얼마나 많은 재주를 저장하고 있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이다. 전화는 물론이고 카메라도 되었다가 오디오도 되었다가 심지어 지문으로 신분 증명까지 해준다. 거기에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세상의 온갖 것들을 화수분처럼 쏟아낸다.

도파민은 운동신경과 감정을 조절하는 물질로 쾌락을 느낄 때 분비되는 신경 전달 물질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여행을 가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구매한 때에도 분비된다. 도파민은 세로토닌과 함께 두뇌 활동을 증가시키고 인체를 흥분시켜 삶의 의욕과 흥미를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다. 그러나 과도하게 분비되면 극한의 긴장과 강박증, 과대망상과 같은 이상 증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술, 담배, 약물, 자극적인 영상물과 오락도 도파민 분비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오락이나 게임을 하지 않는다.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질 못하는 중독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오락기를 손에 잡으면 일상을 접어놓고,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도 날밤을 새우기 예사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점수 올리는 게임에 빠져 날마다 키보드를 두들겨대느라 손가락 끄트머리가 부어올랐을 정도였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면 이겨야지만 직성이 풀렸다. 승부 근성이라기보단 일명 도파민 중독인 셈이었다.

지난겨울 형제들과 정선 여행 중 카지노에 들른 적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재미 삼아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적지 않은 돈을 기계에다 밀어 넣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조명에 몽환적인 분위기의 카지노는 마음의 근육이 단단하지 못한 나의 혼을 쏙 빼놓는 신세계였다. 잠재되어 있던 도파민 중독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나마 다행히 멈출 수 있었던 건 형제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주머니에 있던 얼마간의 돈을 몽땅 털려 빈털터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줄 모르면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이다. 공연의 입장권은 물론이고 햄버거나 음료 한 잔을 사려고 해도 키오스크 사용 방법을 모르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해야 한다. 이러한 중년들을 위해 얼마 전 컴퓨터와 휴대전화 사용 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 생겨 참석하게 되었다. 요지경이었다. 사진에 배경을 더하고 빼고, 얼굴을 갸름하게 다듬고 주름과 잡티를 없앤 다음 처진 눈을 살짝 올렸더니 몇십 년이 젊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YouTube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있었다. 음악이며 요리, 명상에 철학까지 온갖 정보들이 넘쳤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라고 하지 않던가. 온종일 휴대전화에 자발적으로 갇혀 헤어나오지 못한다. 일에 두서가 없고 괜한 조급증에 책만 쌓아놓고 진득하게 독서는 하지 못한다. 도파민이 과잉 분출된 탓이리라.

도파민 단식에 들었다. 마음먹고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었다. 모임에 바쁘게 나가다 휴대전화를 두고 출발한 것이었다. 돌아가기에는 약속 시간이 촉박해 그냥 가게 되었다. 처음 얼마간은 개인비서를 떼고 온 것처럼 불안했다. 세상과 단절된 상실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점차 타인에 대해 온전한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 ‘잘 들어주는 사람이 돼라. 상대가 중요한 사람처럼 느끼게 하라. 진실한 태도로 그렇게 하라.’라고 한다. 타인의 관심사에 대해 오롯이 경청하는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며칠째 간헐적으로 도파민 단식 중이다. 하루 몇 시간씩 휴대전화의 소리를 무음으로 하여 서랍에 넣고 격리한다. 무심히 내다본 창밖에는 온종일 가랑비가 또닥또닥 비의 환상곡을 연주한다. 그새 화단에는 꽃 진 자리마다 조개 속살 내밀 듯 돋은 풀잎들이 생의 악보를 파릇하게 그린다. 창 너머로 바람 한 줄기 들어와 봉두난발 같던 마음자리를 쓸고 간다. 가끔은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살아도 좋을성싶다.

들길을 걷는다. 봄바람은 꽃향기 섞인 풀 향이다. 복사꽃 아래 봄까치꽃이 무더기로 앉았다. 노란 민들레꽃 봉오리에 개미들이 줄지어 행진한다. 저 혼자 풀잎에 앉아 오르락내리락 비를 부르는 청개구리. 사각의 카메라가 아닌 눈으로 담는 풍경은 생명이 옴지락거리는 신비한 파노라마다.

도파민의 단식은 습관에 먼지를 털어내고 마음을 길들임으로써 시나브로 삶이 여유로워지는 ‘여백의 미美’가 아닐까.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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