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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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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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위로 어화 만발이다. 감포 바다, 달무리 져 어스름한 달빛 아래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 무덤이라 전해지는 대왕암이 잠들어있다. 멀리서 바람을 등에 업은 파고가 넘실거리며 시퍼런 기세로 밀려온다. 어김없이 내려서면서도 기를 쓰고 바위섬을 기어오르다 하얗게 부서진다. 한풀 꺾여 해변으로 밀려왔다, 한숨처럼 쓸려간다. 자그르르, 파도와 자갈의 월광 소나타에 바다도 숨을 고른다.

바닥짐은 배의 바닥에 채워 놓은 돌이나 모래, 물 등을 말한다. 배에 실은 화물의 양이 적으면 드센 풍랑에 배가 중심을 잃고 전복될 수 있다. 이때 배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항해할 수 있도록 미리 대비한 것이다. 배의 무게가 가벼우면 흔들릴 뿐만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물속에 적당히 잠겨야 프로펠러가 가동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기초가 되는 바닥이 허술하여 낭패를 보는 때가 종종 있다.

봄마다 화분을 몇 개씩 새로 들여놓는다. 몰인정한 동장군을 견디지 못하고 황량해진 나무의 빈집들이 수두룩하다. 올해도 한련화, 수수꽃다리, 좀작살나무, 그새 이름을 잊어버린 외국종 꽃나무를 새 식구로 맞아 제법 구색을 갖추었다. 그런데 며칠 전 봄바람이라기에는 꽤 나 매섭게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다. 다음날 마당에는 새로 들여온 화분들이 넘어지고 깨져 폭탄을 맞은 듯 온통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바람에 넘어진 화분마다 절반 넘게 흙이 아닌 스티로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다 흙마저 푸석푸석해 높바람에 맥없이 넘어져 뿌리까지 드러난 것이었다. 화분의 바닥이 단단한 흙으로 채워져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곤충의 세계에도 별별 일들이 일어난다. 노린재의 일종인 ‘레드버그’는 일본에서 서식하는 곤충이다. 거의 모든 곤충은 알만 낳아놓고 떠나버리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라 해도 서로 볼일이 없다. 하지만 레드버그는 새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 어미는 과로사로 죽게 된다. 더는 먹이를 가져다줄 수 없게 되면 자기의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준다고 한다. 레드버그 어미에게 새끼는 생을 바쳐 거두어야 할 숙명적 바닥짐인지도 모른다.

나를 바로잡아 준 바닥짐은 자식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는 자만과 보리까끄라기 같은 성격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주변도 불편하게 한 적이 많았다. 갓난아기 적부터 병마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던 아들로 인해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곧잘 하던 학업 성적이 떨어져 원하던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딸도 여러 일로 노심초사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변모없이 겸손하지 못했던 언행들을 반성하게 되었고, 아이들 저마다의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었다. 내가 중도中道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 건 아이들이었다. 어쩌면 지금,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걸림돌 같은 바닥짐은 아닌지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결핍이나 고난을 모르는 재벌 회장의 아들 장근원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변명과 자격지심으로 변변치 못한 삶을 산다. 반면에 박새로이는 보스인 재벌 회장과 주변으로부터 온갖 수모와 고난을 겪으면서 더욱 강인해진다.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도 자기 객관화로 소신껏 행동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게 된다. 인생 항로에서도 적정한 고난과 결핍은 삶의 깊이와 평형을 유지하면서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바닥짐이라 할 수 있다.

어쩌다 고장이 났을까. 불편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가끔 고요하던 마음이 두려움으로 와르르 떨려오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몇 년 전부터 어둠을 타고 불안과 두려움이 내 일상을 덮쳐왔다. 밤에 외출은 물론이고 혼자서는 엘리베이터 이용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애쓰는 사이 불안감은 점점 두려움이 되고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공황장애란다. 심리학자들은 ‘사는 데 얼마큼의 고통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수시로 나의 의식에 침투하여 불안과 공포감을 주는 고통도 어쩌면 스스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마음의 내면을 길들이는 바닥짐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누구나 말 못 할 사정 하나쯤 끌어안고 산다. 부양해야 할 노부모일 수도 있고, 여물지 못한 자식일 수도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궁곤한 결핍과 고난이 그의 삶을 돌덩이만 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수시로 겪게 되는 고비나 고통은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이며 인생 항로를 이탈하지 않고 지탱하며 살아가게 하는 바닥짐일 것이다. 날개를 끊임없이 파닥이며 고도를 조종하는 벌새처럼 삶의 바닥짐은 사람의 내면을 강인하게 만들기고 하고, 나아가 한 걸음 더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갈매기도 파도 소리를 베고 잠을 청하는 밤, 멀리 수평선에 환하게 등불이 걸렸다. 오징어 떼를 유인하는 불빛이다. 깊은 바다 한가운데 출렁이는 거센 파고에도 배는 흔들림이 없다. 만선을 기원하는 어부의 가슴 속 깊이 가족들의 편안한 숙면의 시간이 그림처럼 그려질 것이다. 어야디야, 만선이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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