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푸근함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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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푸근함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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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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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히 늙어가는 빈집에 섬초롱꽃이 파다하다. 집 뒤꼍에 생을 다한 가죽나무는 청태를 둘러 입었다. 살찐 햇살이 장독대에 머문다. 누런 땟국물로 바랜 도배지가 들고 일어나 얼기설기 허술해진 사랑방은 밤새 천식으로 쿨룩거렸던 주인을 닮았다. 집 앞 벌판 사잇길에 개울 따라 부는 유월의 순한 바람이 소싯적 기억을 헤적인다.

마루를 가로질러 제집인 양 진을 친 거미도 출타 중인가. 거미줄이 헐겁고 느슨하다. 작년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 큰댁은 집성촌인 동네에서 살림이 꽤 넉넉한 편이었다. 정갈하고 넓은 마당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기역 자로 앉아있었고 외양간에는 풍채가 좋은 네다섯 마리의 암소와 황소도 있었다. 안방의 벽장 속에는 일 년 내내 쌀로 만든 조청이 자그마한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초겨울이면 강낭콩과 검정콩, 고구마 넣고 끓인 호박죽이 백동 대야에 담겨 부엌의 살강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릴 적 조청을 먹고 싶었던 나는 벽장 아래에다 베개를 쌓아놓고 단지에 담긴 조청을 먹으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에 주먹만 한 혹이 생긴 적도 있었다.

넝쿨을 타고 아기 주먹만 한 호박이 열리는 이맘때쯤 큰어머니는 겨우내 아껴두었던 늙은 호박을 모지랑이 숟가락으로 긁어 전을 구웠다. 호박에 쌀가루와 뉴슈가를 섞어 치대다 가마솥 뚜껑에 기름 낙낙히 둘러 전을 부치면 어른도 아이도 냄새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그때 큰어머니는 왜 그토록 손이 작았던 것일까. 까마귀 날개만큼 새까만 눈동자로 쳐다보는 어린 것들의 입에 호박전 한 넙데기 선뜻 물려주지 않았다. 울까 말까 입만 삐죽거리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치맛자락에 울음보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제 막 담장을 기어오른 호박넝쿨을 찾아 그 속에서 채 여물지 않은 애호박을 기어이 찾아 동글납작하게 썰어 전을 부쳤다. 솥뚜껑 뒤집어 아궁이에 걸고 호박 꽁다리로 기름을 두르면 한여름 요란하게 내리는 소낙비 소리가 났다. 덜 여문 호박 속살에 미나리이파리를 밑그림같이 붙이고 그 위에 금은화를 올린 애호박전. 누가 먼저랄 게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쪼르르 둘러앉아 어미가 물고 온 먹이에 입 벌린 새끼 제비들처럼 받아먹기에 바빴다. 부모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지 않던가. 하나의 콩깍지에 담긴 네 개의 콩알 같은 모습에 엄마는 막 핀 호박꽃처럼 푸근하고 환하게 웃었다.

사랑채에 농익은 바람이 잔다. 사랑방에는 줄곧 지푸라기 냄새와 잎담배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허리춤에 두 개의 쌈지를 달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지전이 들었고 또 하나는 엽초葉草가 들어있었다. 할아버지는 곰방대에 담뱃잎을 비벼 넣어 불을 붙이고는 뻑뻑 빨아 불꽃이 일면 연기와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할머니를 일찍 보내고 홀로 아들 넷을 건사하느라 만성 기침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사랑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쓴 담배 연기는 곰방대 꽉 물고 살담배로 고단한 삶을 태우던 할아버지의 깊은 한숨이었지 싶다.

수년 전 여름, 태풍을 동반한 장대비가 보름도 넘게 내렸다. 연일 홍수로 저수지가 터지고 산사태가 났다. 내가 살던 곳에도 강둑까지 물이 차올랐다. 직장에서도 조기퇴근을 권유했다. 바쁘게 재난 가방을 꾸려 돌배기 아들을 안고 지대가 높은 시골 큰댁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거처했던 사랑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거센 작달비는 해악질하듯 불어대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뭇매를 치듯이 퍼부었다. 밤새 비명처럼 울어대던 비바람은 그예 천장 한 귀퉁이를 무너뜨렸다. 물난리를 피하려다 놀란 가슴 쓸어내렸던 일이며, 겹겹의 세월이 빼곡한 사랑방의 단상들이 보풀처럼 일어난다.

어릴 적 흙담에 붙어 까치발로 들여다보던 오촌 아저씨네 안마당이 담 너머로 훤히 보인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찔레와 수국은 흔적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 키 작은 달맞이꽃이 난장으로 피었다. 시어머니의 구박과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아주머니는 보름달이 서럽도록 희던 한가위 밤중에 마을 뒤 연못에 몸을 던졌다. 아주머니를 잃은 아저씨는 생전에 아내가 좋아했던 찔레꽃과 수국을 한마당 심어놓았다. 그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개울 따라 긴 벌판 사잇길을 걸어 앞산으로 갔다. 그날 마을은 적막했다. 저녁노을은 연못에 핏빛으로 물들었고 초여름 무논에 악머구리만 절절하게 울었다.

좁은 문에 갇힌 코끼리처럼 살던 때가 있었다. 뒤돌아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바글바글 속을 끓였다. 단세포 생물처럼 편협했던 나로 인해 가족들뿐 아니라 내 삶도 스스로 빗장을 걸어 가두었다. 본래 벽이 없는데도 좁은 문에 막혀 있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코끼리처럼 바장거리던 일상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자연을 찾거나 옛 기억에 끌리는 것은 어쩌면 몸에 새겨진 유전적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을 떠나 반세기를 도시에서 살았는데도 오랜만에 온 시골 마을이 낯설지 않고 정겹다. 닳고 닳아서 단단하게 다져진 구불텅한 고샅길에 오래된 기억들이 흑백 필름의 영화처럼 걸어온다.

밥때가 되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친구와 해동갑해 놀다 엄마가 부르면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었다. 날마다 좁은 골목길에는 해보다 먼저 아이들이 재재거렸다. 성급한 매미가 집 뒤 오래된 가죽나무에서 귀에 익은 곡조로 신혼집을 지었다. 매앰매앰.

옛 기억을 걷다가 아침마다 고무줄 입에 물고 곱게 갈래로 머리 땋아 묶어주던 울엄마를 만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주 유년의 고향을 떠올린다. 나를 키워주고 가꾸어 준 세상의 푸근함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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