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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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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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 불청객이다. 추위가 가시자마자 소리소문없이 무작정 찾아와 줄부터 그어놓고 묵언으로 버티는 설치미술가다. 애당초 주인의 허락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부지런하기로는 세상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어느 틈에 은실을 자아 도래방석을 짓고 중앙 바퀴통에 떡하니 걸터앉았다. 저도 나를 봤을까. 꾀꾀로 줄을 타고 집을 비우는 척하는 객이 얄망궂다.

아침저녁 거미와 전쟁이다. 그들의 전투력은 놀라울 정도다. 때를 가리지 않고 은빛 실로 공격한다. 나는 주택의 경비원이다. 무기는 고무호스에 물의 세기 노즐을 장착한 물대포와 길이 조절이 가능한 장대다. 한곳에 정착해 사는 정주성 거미는 줄에 걸린 사냥감을 미세한 감각모의 진동으로 소리를 감지해 잡아먹고 산다. 밤사이 얼마만큼의 전투원들이 모였는지 온 사방에 거미줄이다. 야간비행이라도 한 것일까. 화분과 우체통, 대문에 걸쳐 영역표시를 해놓았다. 사과나무와 남천잎을 쫀쫀한 실로 돌돌 말아 알집도 만들어 놓았다. 말린 나뭇잎은 떼 내야지 다른 방도가 없다. 햇볕이 따갑다. 잠시 휴전이다.

아파트에서 삼십여 년을 살았다. 해마다 정돈된 화단에 줄 맞추어 꽃을 옮겨 심을 때에도 두껍던 햇살 야위어지고 칼바람이 점점 날을 세워도 그저 무관심하게 보아넘겼다. 그러다 옆구리에 강과 공원을 낀 주택으로 이사 온 후로 계절 따라 만나는 다른 모습의 자연은 늘 관심의 대상이다. 겨우내 잠자던 강이 깨어나면 혹독한 추위를 견딘 영춘화, 개나리가 봄보다 먼저 기별 온다. 실 잣는 사냥꾼이 재바르게 활동을 시작하고 더위와 장마가 번갈아 올 때쯤 공원에는 배롱나무꽃의 취기가 불콰하다. 나도 자연의 시계에 맞춰 덩달아 바빠진다. 그중에서 거미와의 한판은 겨울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치열한 묵언의 싸움이다. 저는 살아내려 목숨줄을 치고 나는 또 경비원의 소임을 다해 걷어내는.

방사형의 거미줄 하나를 직조하기까지 콩알만 한 설치예술가는 끈끈한 줄을 천 번도 넘게 반복해 오고 간다고 한다. 그 줄은 사냥터이자 쉼터이고 알을 부화시켜 종족을 보존하는 은신처이다. 홑눈을 여덟 개나 가진 사냥꾼은 줄에 걸린 먹잇감이 아주 작으면 거들떠보지 않고 자기의 몸에 비해 너무 크면 일부러 줄을 끊어 도망가게 한다. 다른 개체가 잡아 놓은 먹이를 가로채는 법이 없고 스스로 사냥해 살아있는 먹이만 잡아먹는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인 실 잣는 공예가는 먹지 않고도 열흘 이상 버틸 수 있다고 하니 가히 생존에 최적화된 결연한 의지의 사냥꾼이 아닌가.

거미는 봄에 알집에서 유충이 깨어나면서부터 일곱 번의 탈피를 거쳐 성체로 성장한다. 일생 실을 뽑아 먹이를 사냥하고 종족을 생산하고 양육하다 생을 마감한다. 일부 종은 집단으로 거미줄을 생성하기도 하지만, 거의 육식성이라 서로 잡아먹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나뭇가지며 전깃줄, 후미진 곳과 바람이 지나다니는 백척간두에다 개별적으로 생을 걸어놓고 산다.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과 거친 폭풍우에도 바퀴통에서 꼼짝하지 않는 모양이 하안거에 들어간 어느 수행자의 모습이랄까. 자발 없는 내가 잠깐 한눈판 사이 날개도 없는 사냥꾼이 순간 지상으로 툭 몸을 던져 유사 비행을 한다. 어쩌면 살아내기 위한 묵언의 몸부림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속담에 재능만 믿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을 꼬집어서 ‘거미도 줄을 쳐야 벌레를 잡는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거미는 머리에 먹이를 마취시키는 독샘이 있다. 복부에는 실을 만드는 액체를 저장하는 실샘이 있고 항문 근처 꽁무니에 실을 뽑아내는 실젖이라 불리는 방적돌기가 있다. 독샘과 실샘은 생존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를 장착했지만, 방적돌기에서 실을 뽑아 줄을 치지 않으면 먹이를 사냥할 수 없고 종족을 이어갈 수도 없다. 인간이 자신의 재능만 믿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것과 매한가지다.

그들은 모성애가 강하기로도 유명하다.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의 <Maman(엄마)>은 거미를 모티브로 만든 구조물로 그녀의 어머니를 나타냈다고 한다. 몇몇 종을 제외하고는 겨울을 맞이하면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산란한 알을 지키려 애쓴다고 한다. 일부 개체이긴 하지만 몸속에 알을 품은 채 죽임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온 사방으로 새끼들을 퍼뜨리기도 한다. 어떤 종은 새끼들을 업고 다니며 돌보기도 하고, 염낭거미는 갓 부화한 새끼들에게 자기의 몸을 먹이로 내어준다. 하찮은 미물이라 여겼던 저들의 끈덕진 모성애는 종족 보존을 위한 묵언의 헌신獻身일 것이다.

바람도 걸음을 멈춘 도시의 찌는 더위와 작열하는 태양을 끌어안고 묵묵히 생의 무게를 견디는 거미의 모습이 안쓰럽고 대견하다.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그늘 깊은 숲속 시원한 물가에 집을 짓고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진 삶을 말없이 잠잠하게 살아내는 거미, 저인들 할 말이 없었을까. 날마다 쏟아지는 무수한 언어들이 비수가 되어 난무하는 지금, 나는 온 기운을 다해 묵언하며 살아본 적 있었던지 되짚어보게 된다.

한차례 소등을 다투는 소낙비가 지나고 햇볕이 따갑다. 창밖 거미줄 어디에도 사냥꾼은 보이지 않고 물방울이 조롱조롱 달렸다. 거미와 자연이 만든 합작예술작품이다. 공짜 선물도 받았으니 한발 양보해 집 모퉁이 한구석은 새끼를 부화하고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가을 끄트머리까지 동거를 허락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 온 후 바람이 살랑 부는 저녁, 성글어진 집을 시침질하는 설치미술가의 솜씨가 경이롭다. 오랜 시간 가쁜 숨 몰아쉬며 지은 집을 무시로 철거했으니 얼마나 원망 했을까. 애써 무심한 척 묵언하는 저 마음, 슬쩍 미안하다.

김지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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