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하지 않으면 살만한 세상이다
  • 경북도민일보
좌절하지 않으면 살만한 세상이다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08.12.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金 鎬 壽/편집국장
 
 결혼을 앞둔 조카딸 아이가 친구들로부터 “네가 부럽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이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부럽다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누구든지 때가 되면 인연 따라 배필을 만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조카딸 아이의 얘기를 조금 더 듣고 보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중등교원 임용고시 준비에 3년째 매달린 친구들이 10여 명이라고 한다. 2년 전 단 한 명만 합격하고, 그 이후로는 감감 무소식이라는 것이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대학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단다.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입사시험을 준비 중인 친구들은 비싼 방값을 지불하고 서울의 골방 같은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직장을 얻은 친구들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보통신 대기업에 근무하는 젊은이는 최근 전체 직원의 20%나 감원된 구조조정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도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기출근, 야근은 물론 휴일도 반납해야 한다고 한다.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친구는 펀드 가입 고객들의 항의와 욕설에 시달린 나머지 전화 받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애니 결혼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 되었는가 보다. 한 친구가 근무하는 어느 금융기관에는 결혼하고도 아이를 가지지 않는 여직원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조카아이가 결혼과 함께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의 나라 한국을 떠나는 것을 그 친구들은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중·고교 시절 외환위기를 맞아 부모가 실직했거나 사업에 실패해 고통을 겪었던 20대 중·후반 세대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대란을 겪고 있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이들을 `트라우마 세대’라고 이름 붙였다. 트라우마(trauma)란 신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겪은 뒤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을 뜻한다. 대학 재학시절 학점과 토익점수를 높이려고 안간힘을 다했고, 비싼 돈 들여 어학연수도 다녀왔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차례 입사지원서를 넣어보아도 `최종 면접’에 나서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대학 졸업 전후의 20대들에게 꿈이나 낭만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팍팍한 현실만 남아있다. 왜 하필이면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를 맞았고, 사회에 진출할 무렵 미국발 금융위기에 시달려야 하는지 요즈음의 20대들은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머피의 법칙’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만하다. 한 세대의 불행은 그 세대만으로 그치는 게 결코 아니다.
 오늘날 `트라우마 세대’가 안은 상처는 그 부모 세대는 물론, 자식 세대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 통계청이 2008년 사회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을 보면, 부모의 노후 생계를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답변이 2002년 70.7%에서 올해는 40.7%로 크게 낮아졌다. 대신 가족과 정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대답이 크게 늘어났다.
 한 마디로 부모 부양의 책임을 정부와 사회에 떠넘긴 것이다. 미혼 여성의 46%는 `결혼해도, 안 해도 그만’이라고 답했다. 세상의 험한 파도를 견뎌내기 힘든 젊은이들이 부모 봉양은 고사하고,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와 사상을 널리 펴려는 경희대 김재홍 교수의 진주 강연회에 지난 주말 우연히 참석했다. 김 교수가 준비한 시는 한 행에서 부터, 두 행, 세 행, 가장 많아야 다섯 행인 시 7편이었다. 김 교수가 소개했던 짧은 시 몇 편이 20대 젊은이들의 고민을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병화 시인의 시 `천적’은 한 행이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가 전부다. 문제의 원인을 바깥에서 찾지 말고 나 자신에서 찾으라는 말로 들린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 나아가 패배감까지 떨쳐버려야 한다. 정현종 시인의 시 `섬’은 소통을 강조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고. 단절됨으로써 소외되고, 불안해 방황하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가족과 친구와 소통해야 한다. 김지하 시인의 `새 봄-9’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노래했다. `벚꽃 지는 것 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벚꽃마저 좋아.’ 차별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조카딸 아이의 친구들이여, 외국으로 시집가지 않더라도 이 땅도 살만한 곳이다. 포기하거나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