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鎬壽/편집국장
푸른 대숲과 서리가 내린 아침, 산 밑까지 이어진 들길, 평온한 물벽의 저수지, 길게 우는 황소의 울음소리, 늙은 감나무와 너른 흙마당, 뒤란에 오종종하게 앉은 장독들, 조리로 싸락싸락 쌀을 이는 소리와 밥 익는 냄새….
고향에 가 이들을 만난다. 고향은 큰 화로와 같다. 생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큰 화로를 갖고 있다. 고향에 가면 은연중에 입은 내상이 치유된다.
눈매도 서글서글해진다. 마치 뜨거운 화로에 넣은 한 점의 눈과 같이 근심걱정은 사르르 녹는다. 두고두고 보아도 이 일은 참으로 신통하고 묘하다.
그러니 고향은 의사 가운데서도 제일의 명의(名醫)이다. 섣달그믐에 목욕하던 일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쇠죽을 끓이던 큰 가마솥을 마른 볏짚으로 씻어내 맑고 찬 산골 물을 붓고 장작불을 넣어 목욕물을 준비하셨다. 그 물로 자식들의 몸을 차례대로 씻겼다. 몸의 물기를 닦아내기 위해 알몸으로 잠깐 부엌에 서 있을 때 몸통을 스윽 한 번 둘러 감던 그 찬 바람의 감촉. 뜨거운 것과 찬 것으로 씻은 그 알몸. 설날을 앞두고 다섯 자식들의 몸을 일일이 씻긴 그 노고의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설날을 맞는 일은 겨울 개울을 건너듯 삼가 조심하는 것이 있었다. 설날은 아무래도 아이들이 신이 나는 날이다. 고향의 아이들은 고목 가지에 내려앉는 때까치처럼 몰려다닌다. 동산 위 하늘로 연을 띄우고 얼음판에 팽이를 얹어 닥나무 껍질로 치며 논다. 마음이 꽃봉오리이다. 새 옷을 얻어 입고 새 호주머니에는 빳빳한 세뱃돈이 들어온다. 밥상 둘레에 앉아 식구들이 떡국을 나눠 먹을 때, 혹은 절을 올릴 때 겨우 예닐곱 살이 된 아이들에게마저 어른들은 으레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시는데 아이들은 그 뜻을 알 리가 없다. 얼굴에 장난기가 자글자글해 고개를 연신 까딱까딱한다. 나이 먹는 일이 마냥 좋은 것이다. 철없는 아이들이 부러우니 어찌 된 영문인가. 나이 먹는 일이 그리 반색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한 지인은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운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누구든 나이를 더할 때에는 개심(改心)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고향에는 아름다운 설날 풍경이 몇몇 남아 있다. 개중에 하나는 설 전날 큰집으로 음식을 보내는 일이다.
탁주와 돼지고기 두어 근을 사서 큰집으로 보내고, 그러면 또 큰집에서 정성이 담긴 정갈한 음식이 왔다. 조촐하게나마 애써 마음을 쓰니 푼푼하다.
명절은 각박함을 넘어선다. 또 하나는 합동 세배를 올리는 일이다. 설날 오후에 이장님은 마이크를 잡아 `에, 에’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마을 회관에서 곧 합동 세배가 있다고 알린다. 회관 마당에는 금세 울멍줄멍 동네 사람들이 모여든다. 대처(大處)로 살림 나간 사람들도 모처럼 모인다. 열을 지어 죽 늘어서 마을 어른들께 절을 올리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술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왁자하니 웃으며 보낸다. 설날은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을 주고받는 날이다. 먼 데서 온 손님을 종일 맞는 날이다. 격려를 아끼지 않는 날이다. 무심한 돌에게도 칭찬을 하는 날이 바로 설날이다. 올해는 내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의 작은 동산으로 아들들과 손자들을 데려가야겠다.
뒷산의 부드러운 능선을 보여주어야겠다. 청보리밭에 오는 봄도 보여주어야겠다. 무엇보다 시골의 너그러운, 마음에 구김살이 없는 어른들을 뵙게 하고 싶다.
따뜻한 화롯가에 함께 앉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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