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이단아, 63년 정치역정 마침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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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의 이단아, 63년 정치역정 마침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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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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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노무현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 모습. 변호사 시절.1988년 4월 제13대 총선 부산 동구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가 가두행진을 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 취임식 모습.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있다. 퇴임후 경남 김해 봉하 마을로 내려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008년 손녀를 태우고 마을 주변을 달리고 있다.

 
88년 13대 총선 통해 제도권 정치 입문, 5공 청문회로 스타 발돋움
2000년 총선 패배 발판으로 대권 도전…盧風 일으키며 청와대 입성
헌정 사상 첫 탄핵소추안 의결·대연정 제안 등 파격과 기록의 연속

 
 빈농의 아들, 노동현장의 투사에서 대통령, 그리고 검찰 출두와 자살…
 23일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숨길과 희비가 담긴 한편의 `서사시’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퇴임 후 짧았던 삶은 불행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정치개혁을 외치며 현실정치의 벽과 온몸으로 맞섰지만 역설적이게도 `깨끗한 정치’를 향한 부르짖음은 그의 명예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참담한 마지막 길을 걷게 한 족쇄가 됐다.
 인권 변호사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대통령에 당선돼 재임할 때까지그는 늘 한국정치의 이단아였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 등 그의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파격과 기록,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세간에서 불리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이 늘 따라붙었고 또한 친숙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세상에 큰 뜻을 펼치고픈 야망은 고교 졸업 후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수차례의 고배를 마신 끝에 나이 서른에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의 길을 걷다 “적성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직했다.
 잠시 안락한 삶을 살던 그가 인권 변호사의 가시밭길로 접어든 것은 81년 부림사건 변론이 계기가 됐다. 이후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노 전 대통령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사건을 통해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지만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가 된 것.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동시에 영남 출신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그의 `소신’은 대통령의 길로 이끈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98년 보선에서 `김대중 깃발’ 아래 종로에 도전,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워 고향 부산에 내려갔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대통령 노무현’을 있게 한 소중한 패배였다.
 그의 무모함은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타고 대중, 특히 영·호남 지역주의에 지친 표심을 파고들면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람과 2002년 대선을 휘감은 `노풍’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노풍의 진원은 호남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는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키면서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그는 대선날 새벽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지만 마지막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정면돌파를 택했고,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특유의 승부수는 청와대 입성의 `기적’을 이뤄냈다.
 `정치인 노무현’의 승부사적 기질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옛 정치의 반동에 맞서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되레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제2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무모하게 보이는 정치 실험은 그칠 줄 몰랐고,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이반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국정 난맥상을 야기한 자충수가 됐다.
 거듭된 재보선 전패로 의회 과반을 잃고 뿌리채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 조기 레임덕에 빠지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의해 일언지하에 외면당했다.
 급진적 개혁정책으로 사회 전반에 피로감이 누적되는 와중에 아파트값 급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등이 맞물리면서 여당 내부에서 탈당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정치적 동지’들마저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정국 타개책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남북 화해협력 관계 정립에 매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남북정상회담을 한 것이 대북관계에서 큰 업적으로 남았다.
 대통령 권좌에 있는 동안에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그를`사지’로 몰고 갔다.
 퇴임 전 입버릇처럼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던 그였지만 역시 전직 대통령들이 걸었던 굴곡을 피해가지 못했다.
 인생행로를 함께 걸은 진보진영 정치인들과 젊은 386들, 특히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친형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씨마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불려나가는 현실속에서 구차한 삶보다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후대의 평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되풀이 되는 한국 대통령들의`수난사’
퇴임 후 불행의 역사 이어져…마침내 노 前 대통령 비극적 서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갑작스레 서거하면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오롯이 새겨진 전직 대통령들의 `수난과 비운’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재임 중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하야’와 시해, 측근 구속, 검찰 수사 등 수난과 비운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전직 대통령은 모두 9명.
 전직 대통령 수난사는 `건국의 아버지’로 불렸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망명 길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발전의 틀을 짜고 민주주의의 싹을 뿌린 공적을 남겼으나 장기집권으로 불행을 자초했다.
 4.19 혁명으로 내각책임제 체제 아래 대통령직에 오른 윤보선 전 대통령도 결국 5·16 군사쿠데타로 도중하차, 대통령 수난사에 한 장을 보탰다. 윤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반유신운동과 관련해 모두 3차례에 걸쳐 사법처리됨으로써 최초로 법정에 선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5.16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2년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으나 18년의 장기집권 끝에 1979년 10월26일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쓰러졌다.
 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에 `시해’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과도기를 이끌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최단명의 대통령직을 수행한 비운의 대통령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갑작스레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1980년 신군부의 집권으로 8개월여 만에 하야했다. 이어 1989년 신군부 등장과 관련한 증언을 거부하다 국회 광주특위에서 국회모독죄로 기소됐고,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공판에 강제구인되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도 집권 당시 `원죄’와 부정축재로 인해 퇴임 후 `옥살이’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육사 시절부터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12·12 군부 쿠데타’, 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항쟁 무력진압’ 등 총칼을 앞세워 차례로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후임 대통령인 김영삼 정권 시절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년가량 복역하다 사면조치로 풀려났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은 자신으로부터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압력에 의해 1986년부터 91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백담사에 유배되기도 했다.
 군사정권 이후 민주화 시대를 연 `양김’(兩金)인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임 시절 자신의 아들이 구속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는 재임 시절인 1997년 한보 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데 이어, 퇴임후 2004년 조동만 전 한솔 부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 자신은 문민정부 시절 안기부 예산 선거전용 의혹 사건인 이른바 `안풍사건’이 터지며, 2004년 증인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임기말 차남 홍업씨와 3남 홍걸씨가 기업체로부터 청탁 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두 아들이 한달새 잇따라 구속되자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치개혁과 높은 도덕성을 표방하며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노무현 전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들이 겪은 수난과 비운의 업보를 비켜가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도덕성을 최대의 무기로 내세웠으나 퇴임 이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검찰 수사를 받는 불명예를 기록했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중 서거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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