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난흥방

2011-01-06     경북도민일보
 “나 이래봬도 안동 권씨요.” 이는 작가 윤흥길이 만들어낸 말로, `내게도 자존심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양반가문 후예로서의 자존심인데, 저 유명한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중편소설에서 등장인물 권씨가 작중화자 `나’에게 하는 말이다. 산업화시대 소외된 자의 고단한 삶을 그린 이 작품에서 권씨는 아내의 출산입원비를 못 구해 다급해지자 자신의 전세방 주인집에 강도노릇을 하려다 들통이 난다. 그 일 뒤 평소에 자존심처럼 그토록 아끼고 잘 닦아 신었던 구두 아홉 켤레를 두고 사라지는데, 행방이 묘연해지기 직전에 권씨가 내뱉었던 말이 “나 이래봬도…”였던 거다.
 70년대 한국문학의 대표적 작품 속에 이런 표현이 나타나고 있듯이 안동은 전통적인 정신문화를 이어오는 고장으로서 자긍심이 대단한 지역이다. 종택(宗宅)이나 서원 같은 유형의 전통유물이 많이 보존돼 있을 뿐 아니라 사대부 사회 특유의 정신문화도 흐트러짐 없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웃이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향약 전통도 고집스럽게 지켜온 안동이다.
 그런 안동이 근래 커다란 어려움에 처했다. 지금 온 나라를 비상사태로 만들고 있는 구제역이 지난해 11월 말 처음 발생한 데 따른 집단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구제역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커지자 지역민 모두가 죄인이라도 된 듯 죄스러워 하면서 최초 발생원인을 두고 주민들 간에 갈등과 반목조차 휘몰아치고 있는 모양이다. 
 지역 사정이 심각해지자 마침내 안동시장이 지난 5일 다난흥방(多難興邦)이란 말을 제시하면서 시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호소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중국 동진(東晋) 개국 때 장수들이 좌승상 사마예(司馬睿)에게 초대 황제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는 권진표(勸進表)에서 유래한 다난흥방은 많은 어려운 일을 겪고서야 비로소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면 좋은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이겠다. 과연 지금 안동시민들에게는 이런 노력과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정재모/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