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月城 왕궁 속살 드러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대형건물터·담장 첫 공개

2015-03-18     이부용기자

[경북도민일보 = 이부용기자/황성호기자] 신라 천년 왕성 경주 월성(月城)이 신라 멸망 이후 처음으로 속살을 드러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는 지난해 12월12일 고유제로 시작한 월성 내부 조사 일환으로 석빙고 인근 중앙 지역 5만7000㎡에 대해 실시한 시굴조사 성과를 18일 공개했다.
 연구소는 이번 시굴조사 결과 기단과 초석(礎石·받침돌), 적심(積心·초석 밑 다짐돌) 등을 갖춘 건물지 6동과 담장 12기 등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건물지 중 3호로 명명한 곳은 정면 12칸, 측면 2칸 규모로 길이가 28m에 이르며폭은 7.1m인 초대형으로 드러났다.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마련한 이 건물터는 적심 간 거리가 정면 2.3m, 측면 2.1m로 조사됐다. 1.4×1.4m 크기인 적심 위에 0.75×0.6m 규모의 자연석 초석을 올렸다.
 부속 시설로는 배수로와 담장이 함께 확인됐다. 3호 건물지와 평행한 담장은 폭1.0m에 강돌을 깐 것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고배(高杯·굽다리접시)와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 등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수습됐다.
 일부 토기에서는 ‘井’, ‘口’자 형태 음각 기호를 새긴 것이 있는가 하면 인근 월성 해자와 안압지, 나정 유적 등지에서 발견된 ‘儀鳳四年 皆土’(의봉4년<679> 개토)라든가 ‘習部’(습부), ‘漢’(한)과 같은 글자를 새긴 평기와도 확인됐다.
 습부는 왕경을 구성한 6개 행정구역 중 하나이며 ‘한’ 역시 다른 지역 유사 유물 출토 사례로 볼 때 6부(部) 중 하나인 ‘한기부’(漢祗部)를 표시한 것이 확실시된다.
 ‘儀鳳四年 皆土’의 경우, 이런 글자를 쓴 기와를 제작한 때가 ‘의봉 4년’이라는대목에서는 이견이 없지만, ‘皆土’라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렇다 할 만한정설이 학계에서는 없는 실정이다.
 심영섭 소장은 “이번 시굴조사는 지하 유구(遺構)의 매장 구조의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하고자 실시했다”면서 “현재까지 확인한 건물지와 담장 흔적들은 유적 내 최상층에 위치한 데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토기와 기와류가 출토되는 점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월성의 마지막 단계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번 월성 조사는 천년 고도 경주의 역사정체성을 규명하고, 대통령 공약사항인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왕궁 복원)’ 이행 차원에서 시작됐다.
 월성은 1914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성벽 하부 5개 층위를 발굴해 뼈화살촉과 뼈침, 탄화한 곡물, 토기편 등을 확인한 이래 주변에서 간헐적인발굴조사가 있었지만, 내부에 대한 실질적인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월성은 신라 천년 수도의 궁성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101년 파사왕(婆娑王)이 처음 쌓았다.
 한편, 연구소는 이번 시굴 조사 성과를 토대로 정밀발굴조사 전환을 오는 20일 개최될 문화재위원회에 요청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