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과불식

2016-04-07     정재모

[경북도민일보 = 정재모] 주역의 박괘(剝卦)는 정의가 점차 쇠퇴해가는 시가의 흐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물이 점차 쇠락해가는 이치를 밝히면서 쇠락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거다. 쇠락은 사물의 전체 과정 중에서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 단계다. 군자는 소인과 똑같이 영합할 수 없고 쇠락한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괘다.
 박괘는 여섯 효(爻) 중 맨 위쪽 효만 유일하게 양효(陽爻)다. 이 효의 효사(爻辭;풀이)가 ‘석과불식 군자득려 소인박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로 돼 있다. ‘큰 과실도 먹지 않고 군자는 덕으로 널리 백성을 구제하지만 소인은 오두막까지 허물어뜨릴 것이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래한 성어 석과불식(碩果不食)이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나뭇가지 끝 최후의 씨과실은 따먹지 않고 두었다가 종자로 심는다는 뜻을 거쳐, 욕심을 버리고 복을 후대에 넘겨준다는 의미로 진화했다.
 20대 총선 공천서 탈락한 더민주당 전병헌 의원이 지난달 22일 총선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 말을 썼다. ‘석과불식의 심정으로 정권교체를 위해 당에 잔류하여 백의종군하는 걸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 거다. 우리 정치인들은 문자속이 깊어 자신의 정치적 고비 때마다 성어를 끌어대는 바람에 한 마디씩 배워온 터다. 보통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문자를 이번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또 한 개 건진 셈이니 그나마 고맙다고나 해야 할까.
 석과불식! 공천에서 배제되면서 이 말을 쓴 사람이야 그 참뜻 잘 알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욕심의 절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복 있다고 그 복 다 누리는 것 아니며, 권세 가졌다고 다 부리는 것 아니라는 가르침은 명심보감에도 나온다. 걸핏하면 옛글 한 줄씩 들고 나오는 우리 정치인들, 이 말이나 제대로 알았으면 한다. ‘아직은 내 떠나갈 때가 아니다’며 여기저기서 흰옷 걸치고 버둥거리는 19대 총선 판을 구경하면서 생각하는 바는 권세든 복이든 끝까지 누리려는 몰골은 보기에 딱하고 추하기만 하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