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죽어도 절하기 싫으면 어찌합니까”

잊지 못할 손님

2017-02-20     경북도민일보

[경북도민일보] 얼마 전, 정년을 앞둔 한 분이 제가 있는 수원까지 찾아 오셨더랬습니다.
그 분은 제가 몇 년 전에 사설학원에서 국가기술자격증 취득반 강사로 재직할 당시 수강생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대기업 생산부서의 팀장이기도 하신 분이 지금 자격증을 취득하시려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시냐고 물어 보았는데 “아직 건강한데 퇴직 후에 마냥 놀 수는 없지 않겠느냐”시며 퇴직 후 재취업 준비를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휴식시간에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나눈 대화였지만 왠지 그분의 표정이 많이 어둡고 심각한 고민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그분은 가끔씩 문자나 카톡으로 잘 있느냐며 안부를 물어왔습니다. 저는 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귀찮아 답장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더랬습니다. 나른한 어느 오후, 그분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절 만나고 싶다며 수원으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전 별로 친하지도 않은 분이 이 먼 길을 오신다기에 마음에 부담이 되어 극구 만류했지만 기어이 오신다기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부는 쓸쓸한 가을 저녁,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까만 양복 탓인지 유달리 하얀 머릿결을 휘날리는 한 사람이 서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에 제 손을 잡으시며 수원에서 제일 좋은 곳에 가서 식사하자는 것을 사양하고 삼겹살에 소주잔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먼 길을 다섯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나를 찾아오셨을까!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꾹 참고 있는데 소주 몇 잔에 취기가 오른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 그때 강의시간에 꼭 한두 가지의 인생의 교훈이 되는 예화나 말들을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수업도중에 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한문으로 사람인자는 막대기 두개를 서로 기대어 놓은 형상이다. 사람은 홀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사람의 뿌리가 흔들린다.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라고?
부부사이가 좋지 않다면 서로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화를 유발하는 행동이나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관계가 깨어지는 대부분의 원인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거나 하찮게 여기는데서 시작된다. 만약,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정녕 생기지 않거든 조용한 시간에 부부가 서로 마주하여 백번씩 맞절을 해보라.
큰절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큰절을 하다보면 먼저 자신을 낮추게 되어 나를 돌아보아 반성하게 되고 마주하는 사람은 상처가 아물어지며 엎드린 당신을 결국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붉어진 눈으로 그분이 저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제가 질문한 것 기억나십니까?”
“아뇨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는지요?”
“선생님! 죽어도 절하기 싫으면 어찌합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죽어도 하기 싫다구요! 그럼 죽기 전에 이 세상 마지막 인사라 생각하시고 하시면 됩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절실히 필요한 것은 마음하나 바꾸는 것이다”라구요.
그 당시에 그 분은 부부불화로 합의이혼을 하려던 상태였습니다.  
그날 이후 그분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아내에게 절을 하기 시작했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미쳤냐며 방문을 세차게 닫으며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변함이 없자, 아내가 절하는 남편 앞에 우두커니 돌아앉아 있더답니다. 아내가 앞에 앉아 있으니 눈물이 나더랍니다.
오랫동안 살면서 내내 다투며 행복도 모르고 살아온 세월. 그 세월 속에 숱하게 상처 준 말과 행동들이 생각나 눈물이 났답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고 통곡이 되어 소리 내어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도 맞절을 시작했고 아내도 나도 잘못한 게 너무 많다며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답니다.
지금은 부부관계가 좋아져 마치 신혼부부 같고 집이 싫어 캐나다로 유학 가버린 자녀들도 돌아와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머무는 조그마한 오피스텔에 들어와 많은 얘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 그분은 고맙다며 또 오겠다며 하얀 머릿결을 휘날리며 포항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택시를 타고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 지으시며 수원 터미널로 떠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