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만남이다

2017-03-30     경북도민일보

[경북도민일보]  독일의 의사며 작가인 카로사(Hans Carossa)는 “인생은 만남의 존재이다”고 말했다. 이 간결한 말에서 우리는 인생의 깊은 정의를 발견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만남은 시작되고 만남이 끝남은 곧 죽음이며 이는 곧 그 사람의 일생이다. 그래서 인생은 만남이며 인간은 만남의 존재이며 인류의 역사는 만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주의 모든 것과 만나는데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만남 중에는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만남은 하늘의 인연이며 관계는 땅의 인연이다. 이 둘의 조화에서 발전도 하고 쇠퇴도 하며 만남의 책임은 하늘에 있고 관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카롤 야스퍼스는 인생의 만남에 두 가지 형태를 말했다. 하나는 겉사람과 겉사람의 옅은 만남(스치는 만남)과 또 하나는 인격과 인격의 깊은 만남(실존적 만남)이며 깊은 만남은 우리 일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만남이다.
 만남 중에는 만나서는 안되는 잘못된 만남과 꼭 필요한 만남이 있다. 잘못된 만남으로는 성경에 카인과 아벨은 질투와 살인의 비극적 만남이며 예수와 유다의 만남은 배신과 가책의 만남이다. 반대로 예수와 베드로, 석가와 아난(阿難)의 만남은 혼과 혼의 깊은 대화 속에 영원한 생명을 희구하는 신앙의 문을 열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의 만남은 인도 해방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단종과 성삼문의 만남에서는 신(信)과 의(義)를 일으켜 충성을 이루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회장과의 만남에서는 한국 경제 발전의 초석을 이루었다.
 교육적 의미에서 최고의 만남은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은 많은 저서를 남겨 오늘날 서양철학을 낳았고 동양에서는 공자(孔子)와 안연(顔淵)의 만남은 ‘논어’를 통해 동양사상의 한 획을 낳았다. 이것은 인류의 정신사(精神史)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위대한 만남이며 토인비(Toynbee)는 ‘역사의 연구’에서 도전과 응전의 만남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미물(微物)인 까마귀의 다 자란 새끼가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만남에서 우리는 반포지효(反哺之孝)의 효를 배우고 있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많은 정치인들을 잘못 만나 9차례 헌법 개정과 수차례의 당명 개정 및 선거구 변경 등을 하였으나 또 다시 헌법 개정이 논의되고 그때마다 국가는 정치적, 경제적, 안보면에서 여러 번 위기와 혼란을 맞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 부통령,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정부장과 최규하 대통령은 시기(時機)를,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과 가족, 김영삼 대통령은 자식, 김대중 대통령은 가족,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과 자식, 이명박 대통령은 형제, 박근혜 대통령은 지인과 잘못된 만남이 우리 역사를 혼란과 수치스러움을 가져왔다. 다음 새 지도자와 국민은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인간은 타인과 만남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성찰적 내면의 만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적 만남은 태극기와 촛불, 당과 당, 지역과 지역, 당 안에서도 진·친·비·반(眞·親·非·反)으로 지역 안에서도 서로 헐뜯고, 타인과의 깊은 만남을 모르고 끼리끼리 만남만을 가지다 보니 자신들의 겉모습만 보고 진실로 보아야 할 내면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만남 즉 죽음의 만남이 아름답고 위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세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더 대왕도 마지막 만남인 죽음 앞에서 “나를 묻을 땐 내 손을 무덤 밖으로 빼놓고 묻어주게, 천하를 손에 쥔 나도 죽을 땐 빈손이란 것을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네”의 명언을 남기고 죽음과 만났다. 인간이 태어날 때 주먹을 쥐고 태어나나 죽을 땐 주먹을 펴고 죽는다는 인생사를 말하고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기 전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들은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를 모릅니다”의 유언은 위대한 용서와 구원과 사랑의 사상을 남겼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죽음 직전 조카 완에게 방패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도록 명하고 큰 아들 희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의 유언은 당시 해전의 중요성과 승리를 염원한 조국애가 몸 속 깊이 담겨있다.
 우리는 어떤 만남을 가져야 하는가. 첫째는 이해(利害)관계를 떠나, 서로 이해(理解)와 신뢰와 존경을 주고받는 인간적인 깊은 만남이어야 한다. 둘째는 지속적인 만남이어야 한다. 서로 필요와 이용을 위한 그때그때 만남이어서는 안 된다. 셋째는 발전적인 만남이어야 한다. 서로에게 삶에 도움이 되고 나침판이 되는 만남이어야 한다. 좋은 만남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만남을 원하면 영혼을 깨우는 마음과 행동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고 스스로에게 만남의 관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한 인격체로 인식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죽은 후 관(棺) 뚜껑을 덮은 후에 올바른 평가가 나온다”고 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만남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이다. 우리는 유한한 만남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만남이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 즉 일생은 어떻게 남겨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