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료는 메탈리카

오성은의 사적인 LP

2018-12-18     경북도민일보

[경북도민일보]

메탈리카의 ‘Metallica’를 들으며

 -십대라는 날카로움
 십대는 날카로운 양날의 칼을 쥔 시기다. 한 쪽 날은 세상을 다른 날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누구든지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뺨 한쪽이 베일지도 모르지. 그래서일까 칼끝은 정처 없이 흔들린다. 방황한다. 망설이고 주저한다. 하지만 십대는 영원한 십대가 아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삶을 연마해야 하며, 부딪히고 쓰러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십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해야 하고 또한 안도해야 한다. 십대라는 말에는 ‘한시적’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떻게 칼날을 휘둘러야 할까 고민하기 보다는 이 칼날의 운명, 무뎌지거나 녹이 슬지도 모르는, 혹은 칼을 쥘 힘이 남지 않은 엄지손가락과 다른 네 손가락 사이를 고민해야 한다. 주먹 쥔 틈으로 날 선 바람이 스친다. 칼날보다 차가운 바람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막 칼을 쥔 그들을 위해 어른들은 그 칼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알려줘야 하며, 얼마나 서글픈지 공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제 손바닥을 들여다 봐야한다. 굳은살이 뱄는가, 손금이 흐려졌는가, 칼자루를 쥘 힘은 가졌는가, 날카로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가. 자금을 모아 칼집을 사도 좋겠다. 하지만 잘 연마된 칼은 어두운 집 속에 갇혀있긴 원하지 않는다. 그 칼은 주어진 이 하루를 베어내기에 더없이 멋진 연장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독을 바른 무기가 되거나 황홀한 춤이 될 것이다.
 
 -원료는 헤비메탈
 돌이켜보면 십대의 내가 발견한 칼의 원료는 중금속(heavy metal)이었다. 비소, 납, 수은, 아연, 셀레늄 등 비중이 4.5 이상의 금속원소가 혼합되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칼은 악마적이고 광기어린 목소리로 나를 유혹했다. 칼집에는 ‘생체에 유해함으로 미량일지라도 주의 요망’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운명처럼 그 칼자루를 쥐었다. 그날 이후로 내 삶이 달라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칼끝으로 고막을 후비고 다녔다. 모자를 눌러쓰고 눈을 매섭게 뜬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온몸이 타오르듯 전율하는 그 느낌이 십대의 나를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전자기타가 앰프 속에서 폭발하고, 베이스기타가 줄이 끊어질 듯 나불대며, 더블베이스드럼은 과히 파괴적이었다. 마이크를 삼킬 듯 입을 벌리는 보컬의 목소리가 번개 치듯 터져 나왔다. 나는 헤비메탈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에 경도되었던 것이다.
 이 메탈의 신성에서 치명적인 한곡을 뽑으라면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을 선택하겠다. 통기타로 여심을 홀릴 작정이나 하고 있던 나에게 메탈리카의 이 곡은 새로운 세상을 맛보게 해주었다. 메탈리카는 구소련이 무너진 1991년 모스크바 투시노 비행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오케스트라와의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행보는 타오르듯 열정적이면서도 매몰찰 정도로 차갑게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나는 앞으로 한 발 내밀다가 다시 거두며 몸을 구겼다가 폈다. 허리를 접고 눈을 치켜뜨고 바닥으로 구르기도 했다. 단 하나의 믿음만은 저버리지 않았다. 이 무거운 중금속의 칼날은 결코 무기가 아니며, 그것은 나 자신에게 도래할 하나의 미래처럼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나에게 헤비메탈은 전에 없던 감정이나 의식의 열림, 즉 자유의 한 감각이었다.
 
 -안녕 샌드맨
 열여덟 살의 나는 영도의 한 고등학교 강당에서 엔터 샌드맨을 연주했다. 관객은 백여 명 정도는 되었을까. 물론 죄다 친구들이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박자를 맞췄고, 모니터스피커에 발을 올리며 미리 연습한 헤드뱅을 시도하기도 했다. 독일 설화에 등장하는 잠의 요정 샌드맨의 유혹과도 같은 이 메탈 자장가는 중독적인 기타리프와 마이너와 메이저를 넘나드는 선율, 심장을 덜컹이게 만드는 박자로 관객의 마음을 마구 두드렸다. 하지만 두발규정으로 5cm도 자라지 않은 머리카락은 건성건성 나부꼈고, 관객의 손끝도 머리카락처럼 나부꼈다. 그 미세한 흔들림은 어디로 가닿고야 말았을까. 강당으로 잠입한 비둘기의 날개는, 암막커튼을 비집고 들어온 오후의 여린 햇살은, 마이크를 벗어난 보컬의 음이탈은, 맥락 없는 퍼포먼스는, 나부끼는 태극기는, 구멍 난 양말의 엄지발가락은. 메탈이 가득한 넓은 강당 안에서 나는 처절한 외로움을 느꼈다. 관객의 마음을 할퀴려 나타난 스크레치의 전도사, 보이밴드의 기타리스트. 나는 뜨거운 핀 조명이 솟아나오는 한 점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박자가 느려지고, 세상이 껌껌해졌다. 쥐고 있던 기타 피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아주 무서운 상상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샌드맨이 찾아와 내게 말을 건네는 그런 장면을. 잠 잘 시간이야, 눈을 감지 않으면 모래를 뿌려버릴 거야. 나는 잠시 눈을 감으며 내가 쥔 칼날이 머지않아 무뎌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예감이 부디 예감으로만 끝나길 바라고 있었던 건지도. 엔터 샌드맨은 내 인생에 단 한번, 그 무대에서만 연주되었다.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