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방

오성은의 사적인 LP

2019-05-07     경북도민일보

[경북도민일보] 래리 칼튼의 ‘Larry Calton’을 들으며

-Room335
예술가들에게는 그들 각자의 방이 있다. 일찍이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에 맞서 ‘자기만의 방’(이미애 옮김, 민음사)을 구축했고 그 방 안에서 성찰하고 때론 우울해졌다. 영화감독 왕가위는 <화양연화> 속 두 주인공의 밀회장소인 호텔 2046호를 <2046>이라는 영화로 발전시킨다. 2046년이라는 배경은 홍콩의 정치, 입법, 사법체제 유예가 끝나고 중국체재가 시행되는 해이다. 전화번호판에서의 2046은 십자 성호의 방향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누군가의 신앙고백이 될 수도 있는 이 숫자는 홍콩의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방인 2046호에서 시작된다. 서귀포 초가삼간의 쪽방에서 우주를 그려본 이중섭은 시대적 몰이해와 고독과 가난의 비극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운다. 이 방들은 그들의 사적인 공간이며 천장을 바라보며 등을 펼 수 있는 공간이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장 필립 투생에게 ‘욕조’(이재룡 옮김, 세계사)는 우주적 공간이자, 어머니의 자궁 안이자, 그만의 방이다. 폴 세잔의 아틀리에, 모네의 정원, 고흐의 침대, 로트렉의 물랑루즈 등 그들의 방에는 온통 그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리고 여기, 미스터335라 불리는 거장의 방이 있다. 자신의 스튜디오에 좋아하는 기타의 넘버(Gibson ES-335)를 붙인 래리 칼튼의 방, 룸335는 재즈 안에서 가장 유명한 방이라는 것에 이견을 붙이기 힘들다.

-335호 방의 비밀
‘Room335’를 만난 건 학창시절이었다. 기타전공자들의 대표 입시곡으로 꼽히는 이 곡은 1978년에 그가 명명한 스튜디오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 그에게 음악이란(예술이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만의 방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고등학교 1학년의 나는 선배들이 연습하는 곡의 제목을 힐끔 바라만 볼 뿐이었다. 지니, 무한궤도, X재팬, 메탈리카를 연습하는 동안에도 나의 눈길은 팝 적이면서도, 유려한 테크닉을 자랑할 수 있고, 경쾌한 울림을 선사할 수 있는 재즈 연주곡 ‘Room335’에 이끌렸다. 그 시절 보이밴드 기타리스트인 나에게는 화려함의 과시만이 오직 음악적 동력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선배의 도움으로 연습하게 된 ‘Room335’는 내가 듣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 있었다. 지판을 현란하게 오가며 전자기타의 짜릿한 손맛을 느껴보려 했던 것과는 달리, 보다 정적인 연주패턴으로 이뤄진 곡이었던 것이다.
다섯 손가락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한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해선 다른 손가락의 근육도 써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약지를 접기 위해서는 중지와 새끼손가락의 일부분을 움직여줘야만 하는 원리이다. 근육 체계가 한 지점에서부터 뻗어 나오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근음(3도로 된 음정의 세 음이 3화음을 이루고 있을 때의 가장 낮은 음)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이 곡은 손가락 근육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연주한 이후 그 흐름을 채보한 것만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다시 말하자면 손가락이 가는 방향으로 만든 곡, 즉 신체의 리듬과 유사한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구성된 곡이라는 것이다.
거장이 부린 묘미를 알아챌 리 없었던 17세의 나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온종일 테크닉에 몰두하고 화려한 제스처에 길들여지고 만다. 나는 완벽하게 이 곡을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각자의 방으로
누군가의 방을 거쳐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하지만 한 평생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방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앞으로 누구의 방을 만나고 또 들어가게 될까.
나는 종종 우울감에 휩싸이는 날이면 그의 방으로 떠날 것이다. 그가 연주하던 스튜디오로, 그의 내면으로. 래리 칼튼은 그의 스튜디오에서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 것일까. 이 곡이 어떤 리듬 속에서 어떤 감각을 펼쳐내길 원했을까. 어떤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곳곳에서 들려오길, 연주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방은 얼마나 따듯하고 안락할까. 그의 방에서 보이는 풍경은 얼마나 아득하고 아름다울까. 음악이 흐르는 그 짧은 동안 한 공간-호텔방, 침대, 욕조, 정원, 극장-에는 연주자와 청취자만이 남게 된다. 그건 현실이 아닌 환상일 뿐이고, 그것이야 말로 음악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순간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Room335의 문을 망설임 없이 열고 들어간다.

오성은 작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