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봉 정복

2007-10-28     경북도민일보
 `거친 수풀에 길이 끊어지고 저녁 해도 낮아졌다. 숙연하게 오싹해져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바빠졌다. 회초리가 얼굴을 때리고 깍지 낀 가지들이 아래옷의 단을 찢는다. 쌓인 낙엽 속에서는 물이 스며 나와 무릅 밑은 진창이다. 향로상봉(香爐上峰)이 지척에서 금세라도 다가올 듯하다.’ 조선시대 실학자 박제가(朴濟家)가 1800년 9월 묘향산을 다녀와서 남긴 `묘향산 소기(고려대 심경호 교수 번역)’의 일부분이다. 일행과 떨어져 홀로 10리나 더 걸으면서 고생했던 노정이 생생하게 묘사됐다.
 단군신화에서 보듯이 산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하늘과 소통하는 곳으로 여겨 금강, 묘향, 백두, 지리, 삼각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산은 심신을 단련하는 수행처이기도 했다. 신라의 화랑들은 산에서 풍류도를 익히며 삼국통일의 의지를 다녔다. 고려 중엽 이후로 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곳이 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속진(俗塵)을 씻어내고 유흥을 즐기려 명산을 유람하였다. 오늘날 산악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1988년 9월 산악인 엄홍길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그는 “에베레스트 정복에 성공한 이후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만일 9000m가 넘는 산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그 산도 단번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엄홍길 저·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며 자신감에 넘쳤다. 하지만 그는 그후 4년 동안 안나푸르나, 낭가파르바트 등에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좌절이 밑거름이 되어 2000년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산을 찾는 연인원이 4억62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지난해 등산 사고로 숨진 사람이 112명인 것으로 소방방재청이 집계했다. 부상자도 2923명이나 발생했다. 산을 두려워하지 않고 놀이터쯤으로 여기는 방심과 안일이 사고를 부르기 마련이다. 
 /金鎬壽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