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100년, 그리고 BTS와 차명석

세계인문기행

2019-10-28     뉴스1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세계문학 서가의 주소는 J16~J17이다. 이곳에 가면 세계문학 베스트셀러들이 진열 중이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세계문학의 경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세계문학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들어가는 작품들은 변동이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시즌인 시월이 되면 변화가 종종 생긴다. 세계문학 코너에 노벨문학상 작가의 대표작이 신성(新星)처럼 반짝 등장하기도 한다.

세계문학 서가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은 눈에 가장 잘 띄는 위치에 놓인다.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984’ ‘인간 실격’ 등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민음사)은 마치 고향집 동구 밖의 500년 넘은 은행나무처럼 그 자리에 묵묵히 버티고 있다.

‘데미안’을 집어 맨 뒷장의 판권을 살펴본다. 헉! 2판 106쇄다.

손가락질받던 문제아 헤르만 헤세

젊은 시절을 순탄하게 지낸 사람이 방황하고 아파하는 청춘을 위로할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목사인 아버지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학교 분위기가 맞지 않아 괴로워한다. 신학 공부가 끔찍이 싫었던 열다섯 소년은 마침내 신학교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아버지를 실망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소년은 자살을 기도한다. 아들을 잃을뻔한 아버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소년은 다시 인문고등학교에 들어가지만 여기서도 적응을 못 한다. 또다시 학교를 중퇴했다. 두 번의 학교 중퇴와 자살 기도! 손바닥만 한 고향 칼브에서 헤세는 동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는 문제아였다.

고향에서 탑시계공장 견습공으로 일하던 그는 막연하지만 작가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는 대학도시 튀빙겐으로 간다. 시계 부속품만 만지작거려서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1895년 튀빙겐대학 앞의 고서점에 점원으로 취직한 그는 책 속에 파묻혀 닥치는 대로 읽고 쓰며 대학생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를 특히 사로잡은 작가는 괴테였다. 괴테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었다. 4년을 튀빙겐에서 보낸 뒤 그는 다시 스위스 바젤로 가서 이번에도 고서점에 들어간다. 바젤의 고서점에서도 역시 4년을 보낸다.

고서점을 그만두고 그는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구상해온 소설을 썼다.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테 카멘친트’가 출간됐다. 첫 작품은 비평과 판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06년 두 번째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발표했다. 청춘의 방황을 다룬 이 소설 역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11년 헤세는 인도여행을 다녀온다. 인도여행 후 그는 평화주의자가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스위스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칼럼을 신문에 싣는다. 독일 언론이 일제히 그를 비난했고 그의 모든 작품이 독일에서 판매와 출판이 금지된다.

악몽 같은 전쟁이 끝났다. 1919년 그는 본명을 숨기고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베를린의 출판사에 장편소설 원고를 넘긴다.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을 숨긴 채 작품성만으로 독자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신인작가 에밀 싱클레어의 ‘데미안’은 나오자마자 문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신문에 ‘데미안’ 서평을 기고하기도 했다. 에밀 싱클레어는 마침내 권위 있는 문학상인 폰타네 상의 수상자로 선정된다.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자 헤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데미안의 실제 저자가 자신임을 밝히고 수상을 거부한다.

강은교와 이석훈이 말하는 ‘데미안’

올해는 ‘데미안’이 세상 빛을 본 지 100년이다. 1차대전 후 세계의 젊은이들이 데미안에 휩쓸려 내려간 것처럼 우리는 모두 데미안을 읽으며 청춘의 바다를 헤엄쳐 건넜다.

지금도 또 다른 젊은 세대가 데미안을 타고 건너는 중이다. 데미안은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 소설이다. 헤세를 아는 독자들이라면 에밀 싱클레어가 사실은 헤르만 헤세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 ‘데미안’의 유명한 첫 문장을 다시 읽어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싱클레어는 크로머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다 상급생인 데미안을 만나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데미안을 도저히 잊지 못하는 것은 다음 구절 때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한 출판사는 데미안 출간 100주년이라는 점에 착안해 ‘내 삶에 스며든 헤세’(라운더바우트)라는 책을 기획해 출판했다. 시인 강은교 역시 고등학교 시절 데미안과 만났다. 강은교는 이 책에 실은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아직도 헤세 시절의 아브락사스는 오지 않고 있다. 나 자신에 이르는 길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그리고 세상은 아직도 거대한 벽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벽’은 흰 옥양목 커튼이 순결한 햇빛을 투과시키는 창이 있는 눈부신 벽이다. 그러기에 나는 아직도 걸을 수 있다. 아브락사스를 찾아서”

한국인의 ‘데미안’ 사랑은 각별하다. 프로야구 LG트윈스 차명석 단장은 공부하는 야구인으로 유명하다. 투수 출신인 차명석 단장은 매년 책 100권을 읽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수년째 실천해오고 있다. 해설위원 시절 그는 중계방송 중에 “선수가 성장해 나가려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알을 깨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데미안’을 언급했다. BTS 역시 ‘피, 땀, 눈물’을 발표하면서 ‘데미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데미안’은 나만의 내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데미안’은 이렇게 생각보다 훨씬 더 넓고 깊숙이 우리의 문화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조정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