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냉장고 사정

2021-08-04     뉴스1
안은영
식품 위주로 장을 본 경우 냉장고 문에 영수증을 붙여놓는다. 어쩌다 집에 온 사람들은 그럴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알뜰한 사람이었냐는 거다. 나는 대답한다. ‘그런 사람 아니’라고. 까먹고 버려지는 것들이 하도 많아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 나아가 허접한 식생활로부터 나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생각해낸 자구책이라고.

내 위장으로는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이 한정돼있고 남은 재료들은 최선을 다해 보관한대도 결국엔 버려졌다. 호기롭게 김치냉장고에 넣어둔 삼겹살과 양지가 스티로폼 포장째로 숙성되다 음식쓰레기장으로 직행한 적도 있다. 양심의 가책과 요리의 부담감이 수직상승했다.

음식을 버리는 게 싫어서 최소한의 식재료로만 지내다보니 ‘냉장고=허기’의 상징이 됐다. 어쩌다 식재료나 음식을 선물 받으면 내심 부담스럽기만 했다. 식재료의 풍요에서 안정을 느끼기보다 적체의 불안이 엄습했다. 꾸역꾸역 칸을 채우다 왈칵 토해낼 것만 같았다. 한때 가장 좋아하는 냉장고 내부의 공간비율은 전체의 30퍼센트 미만이었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시리고 황량하게 냉장고를 비워둔 채로 한 동안 보내기도 했다.

한 사람이 쓰는 언어가 사회생활의 바로미터이듯 1인가구든 다인가구든 한 가정의 냉장고 사용이력은 먹고 살아온 에피소드의 축적이다. 나의 냉장고는 뻔질나게 음식을 해먹(이)던 따뜻하고 아련한 시절,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확 꺾여 느리고 더디게 흘러간 몇 번의 계절, 요리보다 재료에 집착하던 어언 몇 년이 쌓여서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시리고 황량한 백색가전으로만 머무르게 됐다.

나는 참외에 검은 곰팡이가 필 때까지 과일칸 한 번 열어보지 않는, 내가 외로운 만큼 냉장고 속 재료들을 외면해온 시간들을 멈추기로 했다. 요란하지 않되 효율적으로 건강해지고 싶었다. 그날로 깜찍한 자석 하나를 사서 영수증을 붙였다. 기호체계로서 언어를 배우듯 영수증의 활자를 들여다보면서 불균형한 내 식생활의 영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냉장고 앞을 지날 때마다 식재료 영수증이 쪼매난 혓바닥처럼 내게 ‘메롱’ 한다. 요리 재능은 그저 그런 축이라 영수증의 메롱이 달갑진 않다. 안타깝게도 나는 배달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었으니. 도리없이 냉장고 앞에 선 시간이 많아졌다. 먹은 것은 줄을 긋고, 애호박 두개 또는 가지 세 묶음처럼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하는 것들은 자못 창의적으로 ‘세모’ 표시를 했다.

가장 홀가분할 때는 냉장고 속 재료들이 남김없이 웍에 지져지고 도마 위에서 잘라져서 내 위장으로 들어가고 영수증은 밑줄이 줄줄이 그어진 채 휴지통으로 들어갈 때다. 내 부엌에서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을 빼려는 노력만으로도 일상의 신선도가 올라간다.

살아가는 건 희노애락의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를 아끼는 방향으로 단련하고, 그 시간이 조금씩 능숙해질수록 풍요로워진다. 누구도 내 집 냉장고 사정을 나보다 잘 알 수 없다. 하물며 인생은 어떠랴. 보잘 것 없는 영수증 한 장이 내게 선물한 귀한 테라피다. 안은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