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부모, 아들 부모

세상풍경

2021-10-06     모용복선임기자
모용복
가끔 만나는 친구가 있다. 사는데 별 걱정거리도 없고 자식 둘을 거의 다 키워낸 터라 그가 정말 부럽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오히려 그가 나를 부러워하는 게 있다. 내가 딸을 가진 아버지란 사실이다.

두 아들의 아버지인 그는 만날 때마다 내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고 넋두리다. 아들이 없으니 그의 심정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딸이 애교덩어리인 것만은 확실하다. 주말에 할 일 없이 아내와 단둘이 있으면 금방 지루해지지만 딸이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다. 그래서 조금 피곤할 때도 있지만 없으면 금방 보고 싶은 게 딸이다.

딸을 키우는 재미는 딸 가진 부모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들어섰을 때, 아파트 거실 벽을 가득 채운 ‘HAPPY BIRTHDAY 아빠’라는 문구가 적힌 색종이를 보는 순간, 간혹 내 어깨에 기대면서 “아빠 많이 힘들지?”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때 세상 근심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다. 아들에게 이런 세심한 배려를 기대하기란 어렵지 않을까? 나는 여태까지 아들 가진 친구들로부터는 이런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은근히 이들의 원망(願望)어린 눈초리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딸 바보’란 소리를 듣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불과 수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아들을 낳으려 절에 다니거나 한의원을 들락거리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나도 친척이나 친구들로부터 ‘아들 하나는 더 낳아야 되지 않느냐’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강산이 한두 번 변하는 사이 세상 풍속은 더 빠르게 변했다. ‘남아선호사상’은 호랑이 담배 필 적 얘기가 됐다. 이제 어디 가서 ‘대(代)를 잇기 위해 아들 낳는다’고 하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최근 안동시의 사례가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은 최고 양반도시요 유교문화를 가장 많이 간직한 고장이다. 그만큼 남아선호사상도 가장 강한 곳이다.

실제로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30년 전인 1990년 안동을 포함한 경북지역 출생 성비(性比)는 130.6으로 전국 최고였다. 2위는 대구로서 129.8이었다. 그해 전국 평균 성비가 116.5였으니 대구·경북 아들선호사상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확연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올해 8월까지 안동에서 태어난 아기는 총 511명으로, 남아(260명)와 여아(251명)의 차이는 불과 9명에 불과하다. 해마다 격차가 감소하더니 올 들어서는 한 자릿수가 된 것이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여초(女超) 성비역전현상이 올해를 넘기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출생아 성비는 104.8명으로 전년 대비 0.7명이나 감소해 성비균형이 안정적인 흐름으로 향하고 있다.

이처럼 남아선호사상이 빠르게 사라진 이유는 제사나 부모봉양, 대 잇기 등 전통적으로 아들들이 해온 고유역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아들에게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딸이 아들보다 정서적으로 부모와 더 친밀하고 알뜰히 보살피는 경향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60대 이상 고연령층에서 ‘자녀로 반드시 딸은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더 높은 것만 봐도 대 잇기나 제사봉양보다 현재 삶에서 자식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아들 밥은 앉아서 먹고, 딸 밥은 서서 먹는다’는 속담은 이제 옛말이 됐다. 하지만 아들도 아들 나름이요, 딸도 딸 나름이다. 딸이라고 다 부모에게 잘 하고 아들이라고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에게 간 이식한 아들 등 효자 얘기가 심심찮게 매스컴에 등장하는 걸 보면 아직 아들에게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모용복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