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읽는 즐거움] 정사월 디카 시집 '하늘 카페' 읽기

확장된 은유의 힘

2023-12-05     김희동기자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이상옥 시인이 디카시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놓은 지 근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계속 확장일로를 걸어온 디카시의 여러 향방 가운데 주목할만한 일 중의 하나는 디카시가 점점 더 ‘생활 문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하이쿠가 전문 시인들뿐만 아니라 저변에 수많은 일반인 동호회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많은 일본 국민이 하이쿠를 고상한 문화생활의 일부로 즐기고 있는 것을 보라. 이와 매우 유사한 현상이 한국의 디카시 판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기관들이 주최하는 공모전들은 갈수록 그 수가 많아지고 있으며, 응모자들의 수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디카시의 창작 주체가 일반 시민으로 제한되는 것도 아니다. 디카시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눈치를 보던 전문 시인들도 디카시 창작 대열에 점점 더 많이 뛰어들고 있다.

훌륭한 시인들이 쓰는 수준 높은 디카시가 디카시 공동체의 상부에서 디카시가 도달해야 할 수준을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으며, 이런 동력이 일반인 디카시 창작의 수준을 상향 견인하면서 시민들의 디카시 수준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사월의 디카시는 새로운 주목을 요한다. 정사월은 디카시를 쓰기 오래전에 이미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므로 일반인 디카시 창작자는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전문 시인으로서 이 시집을 통하여 ‘생활 문학’으로서의 디카시(이하 생활 디카시)의 훌륭한 모델을 잘 보여준다. 디카시의 저변에서 ‘생활 디카시’의 규모가 점점 확대될 것이 분명한 점을 참작하면, 전문 시인이 보여주는 수준 높은 생활 디카시는 다수의 일반인 창작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정사월 시인은 특정한 주제를 깊이 몰고 가거나 난해한 사변을 디카시의 소재로 삼지 않는다. 그녀의 디카시들은 매우 일상적이며 따라서 출발부터 생활 디카시의 길을 분명하게 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디카시들은 가독성이 좋다. 그러나 일상을 다루는 생활 디카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디카시들은 매우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정찰 중입니다

적군은 잠시 물러간 상태입니다만

이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르니

눈에 불을 켜고 지켜야하겠지요

―「포인트 맨」 전문

시인은 사진 속의 능소화꽃들에서 척후병(“포인트 맨”)의 매서운 눈을 본다. 아군보다 늘 앞서 전진하는 척후병들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매복하고 있다. 그들의 몸은 푸른 숲속에 완전히 감추어져 있고, 두 눈만 반짝이며 적의 동태를 살핀다.

시는 문자-기호를 다른 문자-기호로 은유한다. 그러나 디카시는 사진-기호를 문자-기호로 은유한다. 이 작품은 사진 속의 빼곡한 능소화 잎새들을 전쟁터의 무성한 숲으로, 그사이에 핀 능소화꽃들을 척후병의 매서운 눈으로 은유하고 있다.

시인은 허름한 농가의 벽을 무성하게 뒤덮고 있는 능소화 잎새들과 꽃에서 어떻게 전쟁의 이미지들을 읽어냈을까. 이런 질문은 ‘페트라르카F. Petrarch는 어떻게 연인의 눈길을 눈을 녹이는 태양에 비유했을까’라는 질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시는 겉으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해 그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낸다. 이것이 은유이다. 은유 중에서도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기발하기까지 한 은유를 ‘기상寄想/conceit’이라 한다. 기상은 확장된 은유 혹은 과장된 은유이다.

연인의 눈길을 눈을 녹이는 태양에 비유한 페트라르카의 비유를 페트라르크 풍의 기상이라 부른다면, 우리는 위 작품에서의 비유를 정사월 풍의 기상이라 부를 수 있다. 정사월은 은유를 넘어 기상에 가까운 비유를 동원함으로써 사물을 새롭고 낯설게 만드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위 작품의 기상은 독자들에게 전쟁의 공포나 불행 따위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위 작품은 전쟁에 관한 심각하고도 진지한 명상 대신에, 즐겁고 유쾌한 발상의 기쁨을 제공한다. 이럴 때 폭력-기의로서의 전쟁은 사라지고, 꽃과 척후병의 눈 사이의 시각적 유사성을 찾아내는 재치와 유머가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전쟁은 어린아이들의 놀이처럼 즐겁고 명랑하다.

늙은 어미의 걱정 한 덩이

시린 하늘에 걸렸네

―「노심초사(勞心焦思)」 전문

이 작품에서 사진을 빼놓고 문자만 보면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문자를 빼놓고 사진만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를 동시에 볼 때, 사진과 문자 사이의 케미(화학반응)가 비로소 일어난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호박의 사진-기호는 그 자체 무한한 의미로 열려있다. 그러나 의미의 과잉은 의미의 부재나 마찬가지이다. 두 행밖에 되지 않는 문자-기호는 일반화되어 무한대로 열려있던 사진의 스투디움studium을 시인만의 푼크툼punctum으로 바꾸어 놓는다.

시인에게 허공에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늙은 호박의 모습은 오로지 “늙은 어미의 걱정 한 덩이”로 읽힌다. 이렇게 사진-기호를 문자-기호로 전환할 때, 롤랑 바르트R. Barthes의 말대로 “더는 기호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가 생산된다. 이런 전환은 오로지 정사월 시인만의 몫이고, 그녀만의 기상이다.

저들과 함께했던 삶

너무 무거웠던 게야



환갑 고개 넘자 찾아온 중풍

근육은 어디 가고

아장아장 걷는

―「아버지」 전문

앞의 작품들에 비해 기상의 강도는 떨어지지만, 이 작품은 깊숙한 무게로 삶의 애환을 건드린다. 첫 행의 “저들”의 의미는 사진을 들여다보아야만 드러난다. “아버지”의 인생이 저 가스통들처럼 “너무 무거웠”다니. 아버지는 “환갑 고개 넘자” 쓰러져 “근육은 어디 가고/ 아장아장 걷는”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사진 속의 가스통들은 하나가 아니라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개다. 그것은 아버지가 건너온 삶의 무수한 난제들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고, 화자의 아버지만이 아닌, 그와 유사한 인생을 걸어온 세상의 다른 많은 아버지를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의 이미지스트Imagist들에게 이미지가 그랬던 것처럼, 은유나 기상은 행의 수가 제한된 디카시의 형식에서 의미의 풍요를 성취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은유를 경유하지 않고 시에 이를 수 없다.

두 눈 뻘겋게 뜨고 있어도

차갑고 딱딱한 것들이

제 몸으로 직진하여 온몸이 시립니다

올가을은 또 어찌 보낼까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주세요」 전문

디카시가 사진과 문자의 화학적 결합이므로 디카시에선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양쪽이 모두 중요하다. 디카시 창작자는 사진과 문자 양쪽에서 최대치의 가성비를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디카시는 사진시가 아니므로, 디카시의 사진이 반드시 예술사진의 수준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일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어떤 대상도 디카시의 사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디카시의 사진은 은유나 기상으로 바로 전화될 수 있는 전前-은유pre-metaphor나 전前-기상pre-conceit의 상태면 더욱 좋다.

사진-기호가 문자-기호와 만나기 전에 이미 예비적 은유와 기상의 고압 상태에 있다면, 그런 사진-기호는 문자-기호와 만나 강렬한 화학반응으로 터져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위 작품의 사진은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이지만, 시인이 두 개의 붉은 신호등을 마치 가로수의 눈처럼 보이는 각도에서 포착함으로써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전-은유의 상태에 도달하고 있다.

이제 어떤 문자-기호를 추가해 이 사진-문자의 화학반응을 극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는다. 시인은 결국 문자-기호를 동원해 초록 나무에 닥쳐올 시간의 폭력을 읽는다.

이 가련한 나무는 온몸이 시리도록 “차갑고 딱딱한 것들”이 몰려오는 가을을 “두 눈 뻘겋게 뜨고” 지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경계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른다. 초록 장식들은 다 떨어질 것이고 나무는 앙상한 죽음의 시간을 또 견뎌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는 읊조린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주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읽어내지 못하겠다



방향을 잃었다

―「암호」 전문

이 작품 또한 ‘정사월 풍의 기상’이 매우 돋보이는 디카시이다. 피사체인 자동차는 하필이면 흰색이어서 보닛 위의 소나무 잎새들을 선명하게 보이게 하고 그것을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낸다. 화살표 혹은 직선처럼 보이는 소나무 잎새들을 시인은 일종의 방향키로 읽는다. 보닛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화살표(와 직선)들은 복잡한 인생길을 달려야 할 자동차에겐 갈 길의 “암호”들이다. 제목을 “암호”로 달면서, 시인은 의미의 매듭을 하나 더 만들어놓는다. 보닛 위의 화살표들은 길을 가리키는 방향키이자 동시에 길을 잃게 하는 “암호”이다. 생의 길은 방향만으로 쉽게 찾아갈 수 없다. 생의 간단하고도 쉬운 길을 가르쳐주는 지도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방향을 담고 있는 “암호”들 뿐, 우리는 그 암호들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 모든 암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길을 잃은 자들’일 뿐이다.
 

빈 마당에

하나둘 모여든 이야기

늦가을 빈집에 남겨진

화두

―「화두」

디카시의 소재는 천지에 널려있다. 말 그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 모든 것이야말로 디카시의 재료들이다. 문제는 흔하디흔한 스투디움에서 푼크툼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이다. 위 작품의 사진은 일반적이고 흔한 정보에 불과하다. 시멘트로 포장된 허름한 민가의 밋밋한 마당에 도대체 우리의 마음을 휘젓는 무엇이 있을까 의아스럽다. 그러나 시인은 이리저리 바람에 몰리다 한곳에 모인 나뭇잎들에 주목한다. 서로 다른 나뭇가지의 서로 다른 자리에서 움트고 자랐다가 마침내 바람에 떨어진 저것들은 어쩌면 저렇게 한곳에 모여있을까. 나뭇잎들은 “빈 마당”을 서사로 채운다. “늦가을”은 삶을 정리하고 회상하는 시간, 혹은 인생의 마지막 모서리를 앞둔 시간이다. 죽음을 넘어 이제 흙으로 돌아갈 적멸의 시간에 “하나둘 모여든 이야기”들 때문에, 텅 빈 마당이 소란스럽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각기 어떤 “화두”를 안고 태어나 자라고 늙으며 병들어 어떤 이야기들을 남길까.


너희들의 외침 같아서

너희들의 붉은 울음 같아서

그냥 지나가기 어렵구나

―「안전할 권리」 전문

앞에서 ‘생활 디카시’라는 표현을 했지만, 생활 디카시의 소재가 되는 일상(생활)은 만만한 공간이 아니다. 일상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이 축적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체제의 기획이 강제되는 공간이고, 개인과 집단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역사가 기록되고 쌓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생활 디카시의 소재를 ‘평범한 개인의 평범한 일상’에 가두면 안 된다. 『일상성 비판』으로 유명한 앙리 르페브르H. Lefebvre의 말대로 일상은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진정치 못한 경험”이기도 하다. 위 작품은 사람보다 자본을, 사람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시스템의 문제로 발생한 ‘사회적 재난’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너희들”의 범주엔 세월호 사건과 이태원 사태의 희생자들, 현장에서 끔찍하게 죽어간 노동자들 등, 모든 형태의 “붉은 울음”들을 집어넣을 수 있다. 시인은 붉게 타오르는 단풍 앞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외침”을 듣는다. 정사월 시인의 일상은 이렇게 사적 개인만이 아니라 공공 영역을 포함한 사회의 전역으로 확대되어 있다.

무언가에 이끌려 찍은 사진

폼이 안 나 그냥 품고 있으면

어느 날 문득 꽃이 피기도 해

―「디카시 짓기」 전문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정사월 시인의 ‘디카시론’이기도 하다. 그녀는 고백한다. 그녀에게 디카로 사진 찍기는 “무언가에 이끌려”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이끌림이 없이 그 누구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

디카시는 시적 주체가 특정한 대상에 매혹당하는 시점에서 이미 시작된다. 디카시는 매혹의 순간에 디카(휴대폰)로 매혹의 정동affect을 잡아내고, 그 매혹의 박동을 가능한 한 짧은 문자-기호로 옮겨낸다.

사물/사진-기호/문자-기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 매혹의 연속체가 바로 디카시이다. 그러나 때로 사진-기호로 포착된 매혹이 문자-기호와 바로 연결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당장 “폼이 안 나”더라도 한동안 “그냥 품고 있으면” 사진-기호는 “어느 날 문득” 다시 문자-기호와 만나 “꽃이 피기도” 한다. 디카시에서 말하는 창작의 ‘즉순간성’이란 시간의 순서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이 가동되는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시집의 디카시들은 어떤 의미로 ‘생활 디카시’의 정석을 보여준다. 디카시에 관한 오해가 분분한 가운데, 디카시 이론이 이처럼 정확하게 시로 실천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 게다가 정사월은 확장된 은유(기상)의 막강한 힘을 사용할 줄 안다. 이 시집이 널리 읽히기를 고대한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