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와 사마천

2008-05-08     경북도민일보
 사마천(司馬遷)은 그 부친 사마담을 이어 중국 한나라의 사관(史官)인 태사령이 되었지만 느닷없이 한 사건을 만난다. 당시 이능(李陵)이라는 명장이 불과 5000 병사로 10만 기병을 상대하여 그 중 1만이 넘는 흉노를 살상했으나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한무제가 그 결과만 놓고 이능을 벌하려 할 때 사마천은 양심과 정의감으로 이능을 변호했다.
 한무제가 이능을 처형하고 사마천마저 사실을 왜곡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게 생겼을 때 `역사의 저술을 완성하라’는 망부(亡父)의 유지 때문에 죽지 못하고 스스로 궁형(宮刑)을 택한다. 궁형은 남성을 거세하는 형벌이니,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다. 그렇게 불행한 생애를 살았지만, 그 불행 때문에 2000년도 넘게 인구에 회자되는 만고 영웅으로 남았다. 불후의 명저 사기(史記)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엊그제 5일 타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옛날의 그 집’이란 시에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구절을 남겼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행복했더라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무섭기도 했지만/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나를 지탱해주었고/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중략)…그 세월, 옛날의 그 집/그랬지 그랬었지/대문 밖에서는 늘/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모진 세월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얼마나 치열한 소명의식으로 글쓰기의 고통을 인내했으면 사마천을 생각하면서 살았노라고 술회했을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이제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한국현대문학의 극점(極點)을 이루고 홀연히 떠난 영웅, 오늘 향리인 통영 미륵산 기슭에 마련된 유택에 든다. 고난의 육신 떨쳐버리고 영면에 드셨으니, 부디 고이 잠드소서.  정재모/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