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밟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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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밟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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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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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져간 것들 중 요즘 같은 계절에 떠오르는 기억이 보리밟기다. 늦가을에 씨를 뿌린 보리는 겨울이 오는 줄도 모르고 싹을 틔워 파란 잎을 대지 위로 밀어 올리게 되는데 그러자마자 그만 동장군이 몰려와 잎을 얼려 누렇게 말라들게 만들어버린다.
 더욱이 밤마다 서리가 내린 땅바닥은 엉겨 얼게 되고 삐죽삐죽 성에처럼 서릿발을 뻗친다. 땅은 서릿발에 부풀어 스펀처럼 일어서고 보리 뿌리는 의지처를 잃고 공중에 뜨고 만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보리밟기다. 서릿발로 들뜬 겉흙을 눌러 주고, 보리의 뿌리가 잘 내리도록 한겨울서부터 이른봄에 이르기까지 보리 싹의 그루터기를 밟아 주는 일이다.
 보리의 뿌리를 땅에 붙여 살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자 과정이다. 그러지 않고 방치한다면 보리는 말라죽는다. 뿌리가 허공에 뜬 식물이 살아남을 리 없기 때문이다.
 엄동설한 이제 갓 싹을 틔워올린 약하디 약한 보리를 꽁꽁 다져 밟아 주어야만 비로소 살아 더 튼실한 열매를 맺게되는 이 잔인한 역설을 시골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다 안다.
 고3 수험생들은 어제 대학입학수학능력 시험 성적을 각자 받았다. 만족한 성적이 나온 수험생도 있겠지만, 더 많은 우리의 청소년들이 아쉬워하며 절망할 것이다. 허망감과 좌절감으로 몸부림쳐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흡족치 못한 수능성적에 너무 비관하지 말아야할 일이다.
 어린 나이에 일찍이 좌절을 맛보고 아득한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칼날같이 매서운 추위 아래서 그것도 갓 피워올린 보리싹이 모질도록 밟혀야만 나중에 더 튼튼한 작물이 될 수 있듯이 청소년기의 때 이른 좌절과 절망이야말로 어쩌면 성공으로 가는 길목의 홍역 같은 과정이자 양약일 수 있다.
 그것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것은 수능성적 몇 점 더 받은 것보다 훨씬 값진 일임을 알았으면 한다.
 정재모/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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