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자락 신라천년의 얼이 숨쉬다
  • 김재봉기자
토함산자락 신라천년의 얼이 숨쉬다
  • 김재봉기자
  • 승인 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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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명산을 찾아서 9. 경주 토함산

▲ 불국사 전경

석굴암 해맞이, 팔경 중 하나로
석굴, 신라 불교예술 최고 걸작
불국사와 세계문화유산 공동등록

통일신라 미술 정수로 꼽히는
다보탑·석가탑 마주보고 자리해
산 전체 하나의 유적지라 불려

 

 경주에 위치한 토함산(746m). 신라천년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東嶽)이라고도 불린다. 신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손꼽힌다. 천년 신라 문화의 정수로 꼽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모두 토함산이 품고 있다.
 예부터 산 전체가 하나의 유적지라할만큼 불교유적과 유물이 많았다.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에서 가장 높고, 동해와도 가까워 고대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한다’는 이름에 값하듯 안개와 구름이 깔려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가 하면 어느 사이엔가 걷히면서 장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운좋게 토함산에서 동해 위로 빨갛게 떠오르는 해를 보면 토함산이라는 이름이 갖는 뜻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석굴암의 해맞이는 옛부터 우리나라 팔경의 하나로 손꼽혀왔다.
 서남쪽 자락에 있는 불국사에서 석굴암이 있는 정상까지 산모퉁이를 굽이돌아 올라가는 8.2km의 자동차길도 멋진 시야를 선사한다. 불국사 입구에서 매표소 우측으로 산책로를 따라 등산할 수도 있다
 
 #중턱에 불국사 자리잡아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이 사찰은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돼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절 창건 때 세운 다보탑·석가탑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한 것이라 전한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정상 가까운 곳에 석굴암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해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했다.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재위기간(742~765)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됐다.
 /김재봉기자 kjb@h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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