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은 설경...무릉도원이 예이던가
  • 김재봉기자
하늘과 맞닿은 설경...무릉도원이 예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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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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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명산을 찾아서- 11. 구미 금오산

▲ 약사암 전경.

명금폭포·도선굴 등 명소 가득
옛부터 경북 8경의 하나로 꼽혀
20여개소 절터 불교문화 유허로
고려 충신 길재가 머물러 유명

 

 경북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에 걸쳐있는 금오산(977m).
 정상 일대는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쪽은 칼날같은 절벽이 병풍을 이루고 있으며 산세가 가파르다. 정상부는 달이 걸린다는 정상인 현월봉, 약사여래의 전설이 담긴 약사봉과 보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 부근은 하늘로 비상하려는 새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 같기도 하여 와불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외관이 장엄한 만큼 명소도 많은 금오산은 야은 길재선생과 고사리에 얽힌 전설로도 유명하다. 금오산의 명소로는 금오저수지, 채미정, 명금폭포, 도선굴 등이 있다.
 197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관광시설이 골고루 갖추어진 명승지이다. 정상부근에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으며, 단풍의 명소로 일명 금강이라 불리우며 옛부터 경북 8경의 하나로 꼽혀왔다. 정상에서 북동쪽으로는 금오 저수지와 구미시가 보이고 경부 고속도로와 낙동강구비가 보이며 동쪽으로는 구미공업 단지, 북서쪽으로는 효자암, 제석봉, 국사봉이, 북쪽으로는 선산읍이 보인다.
 산 정상의 금조산성 암벽밑에는 약사암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 기슭에는 고려 말 충신 길재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채미정이 있다. 이밖에 북쪽계곡의 중턱에는 금오폭포와 도선굴이 있고 북서쪽의 거대한 암벽에는 마애불이 부각돼 있다.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온 산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이었다. 고려 때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이라 불렀으며,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다.
 금오산의 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는 새를 따라 왔더니 이 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왔다고 하여 금오산이 되었다고 한다.
 금오산 능선을 유심히 보면 `왕(王)’ 자처럼 생긴 것도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거인산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와불산이라고도 한다.
 통상 `숭’자는 `숭(崇)’을 많이 쓰나 금오산의 경우에는 `숭(嵩)’을 쓴다. 자전을 찾아보니 `숭산(嵩山)’은 고유명사로 중국의 오악 중에서 가운데 위치한 중악인 숭산을 말한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 또는 소림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그 숭산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칠곡군 북삼면에 속한 금오산의 남쪽 자락에는 `숭산’이란 마을이 있으며, 소림사라는 이름으로 옛 절터에 중창된 절도 있다.
 #곳곳에 널린 불교문화 유적

 이두문이 적혀 있는 유일한 탑인 갈항사 동탑과 서탑은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실려 가서 이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돼 있었다. 보봉 아래에는 일출을 정면으로 받는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이, 숭산마을 위에 자리 잡은 고찰 선봉사에는 보물인 선봉사 대각국사비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앞에 서 있다.
 정상 아래의 천년 고찰 약사암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지리산에서 모셔 온 부처님으로 직지사와 수도암에 모셔진 부처님과 한 자리에 있었던 `형제불’이라는 전설이 전해 온다. 대혈사지, 갈항사지, 동양사지, 보봉사지 등 금오산록의 20여 개소의 절터가 번성했던 불교문화의 유허로 남아 있다.
 #고려 충신 길재도 거처한 곳
 `일선지’에는 고려 충신 길재가 금오산에 머물었다고 했다. 단언하면, 금오산이 절경이어서 길재가 머물렀고 길재가 머물러서 금오산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조선조의 수많은 학자와 시인 묵객이 금오산 인근에서 길재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 심지어 금오산 근처에 오지도 않고 `오산(烏山, 금오산) 낙수(洛水, 낙동강) 운운(云云)’하며 지은 시도 있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 금오산 입구에 자리 잡은 채미정이다. 길재를 향사하는 금오서원은 원래는 금오산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난 후 선산읍 원리로 옮긴 후 채미정을 지어 길재의 유허를 기리는 곳이 된 것 같다. 길재가 개성에서 내려와서 금오산의 대혈사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위치를 알기는 어렵다. 아마도 채미정과 폭포 사이의 어디일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금오산에도 산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TV 사극을 통해 산성이 있으면 적군과 전투를 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 산성은 거의 없다. 맨 몸으로도 오르기 쉽지 않은 산에 위치한 산성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장수는 없기 때문이다.
 금오산성은 인동의 천생산성과 함께 낙동강 길목을 조망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병참 기지로서의 기능이 뛰어나다. 금오산 서편 자락 수점마을과 갈항마을 사이에 우장마을이 있다. `쇠바탱이’라고 부르는 우장마을에서는 소를 데리고 금오산 내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성안에 살던 사람들
 조선 후기 선산 사람 김하정의 `유금오산록’이 그의 문집 `삼매당집’에 전해진다. 김하정은 금오산 정상부의 사찰에서 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금오산 내성에는 유사시 승병과 군사들이 주둔하였으며, 산성을 고칠 때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산성에서의 민간인들의 삶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나, 가장 최근까지 성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1970년대 독가촌 철거령으로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많을 때는 10여 호, 적을 때는 7~8호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들이 산성에서 생산한 배추가 시내에서 팔렸고, 더러는 감자술을 제조하여 방문객에게 팔아 `금오산 감자술’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들은 산중인 내성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고, 산자락에는 여느 농촌과 같이 주민들의 수는 줄었지만 아직도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마을들이 수점마을, 갈항마을, 숭산마을이다. 금오산록의 이들 마을에 있는 옛집들이 금오산록에서의 삶의 흔적을 어느 정도 전해 주고 있다.
 #사라진 마을, 성안마을
 오늘 찾아보는 마을은 금오산 정상 아래 내성 안에 자리 잡았던 성안마을이다. 짧게 잡아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던 성안마을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이다.
 당시 내무부는 화전민 정리사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수많은 산골과 섬에서 독가촌들이 철거되었다. 해발 800m의 산 속의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을이 사라졌다. 1789년(정조 13)의 기록에는 금오산의 원호(元戶)가 180호이고 451명이 살았다고 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나온 `청구도’에는 내성 안 마을에 40호가 거주했다고 한다. /김재봉기자 kjb@h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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