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의 악마’박형서, 소설의 경계 확장시키다
  • 이경관기자
`농담의 악마’박형서, 소설의 경계 확장시키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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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라비… 박형서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288쪽 l 1만3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우리는 신이 아니어서, 세상 어디에든 머물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존재할 공간을 빼앗기면 존재 또한 사라진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범수의 자리를 원했고 범수 역시 마찬가지로 남의 자리를 원했다. 공간은 유한하니 차지하기 위해선 격렬하게 다툴 수밖에 없다.”(84쪽)
 무한한 점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만든다.
 문단에서 `뻔뻔한 허풍’과 `발칙한 상상’으로 대변되는 박형서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끄라비’. 그는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출간 후 기이하고 극단적인 상상력과 위트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왔다. 그는 일곱 편의 소설을 담은 이번 소설집에서 다시 한번 소설의 경계를 확장, `박형서’라는 작가의 존재감을 되새겼다.
 “그 무참한 자해 공갈 앞에서 나는 공포가 아니라 수치심을 느꼈다. 그간의 자세를 단순한 호의라 여겼던 순진이 부끄러웠다. 다정한 배려에 미혹되어 있는 동안 끄라비는 제 사랑을 지극히 노골적인 집착으로 발전시켜왔던 것이다.”(32쪽)
 표제작인 `끄라비’는 태국의 휴양지 끄라비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소금기를 품은 해풍이 불어와 귀밑머리를 간질이고 누군가가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닮은 산이 있는 끄라비의 매력에 빠진다.
 그런데 평화롭기만 하던 끄라비가 주인공이 떠날 때가 되자 기상을 악화시키는 등 질투를 한다. 질투는 주인공이 애인과 함께 끄라비를 찾았을 때 정점을 찍는다. 주인공을 사랑했던 끄라비는 그와의 이별을 막기 위해 그를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한 여행자를 사랑했던 끄라비, 그가 품은 사랑의 마음은 오롯이 자신의 감정만으로 가득해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 주인공에게는 폭력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박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으로 빙자한 폭력을 그렸다.
 “몇몇 이들이 호사롭고 안락한 공간을 독차지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능하다면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한 뼘의 빈 땅조차 회수하려 드는 모습은 도무지 납득할 도리가 없었다. 누구도 공터 따위를 원하진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 굳이 공터에 엎드려 있다면, 거기엔 그럴 만한 의정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마구잡이로 몰아세워 쫓아내는 건 어디든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뒈지라는 소리다.”(89쪽)

 소설 `무한의 흰 벽’ 속 고수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또 누군가에게 뺏기는 현대인들의 인간군상을 대변한다. 그들은 상대의 공간을 빼앗기 위해 잔인한 폭력을 행한다.
 소설 속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결국 자리를 잃고 떠돈다. 그들은 마치 높은 취업의 문턱에 허덕이는 청년과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베이비붐세대들과 닮았다. 갈 곳을 잃은 자들의 포효는 무한의 흰 벽에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소설 `Q.E.D’는 어떤 증명에 일생을 바치는 한 수학자의 이야기다. 제목 `Q. E. D.’는 `quod erat demonstrandum’, 즉 `이상이 내가 증명하려는 내용이었다’라는 의미로 수학자들이 증명을 마칠 때 찍는 약호다.
 소설 속 수학자는 파이(π)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점을 향해 수렴되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수학자의 작업은 뚜렷한 진척을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집념과 열정을 가진 수학자의 면모에서 문학에 대한 박 작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태생적인 청각기관을 통해서나 알아챌 수 있는 몇몇 특별한 종류의 영감이 아쉽긴 하지만, 나는 배웅할 준비가 되어 있다.”(271쪽)
 소설집 마지막을 장식한 소설 `어떤 고요’는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위트와 비애가 함께 버무려진 문장은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마음 한 구석 아릿함으로 자리한다.
 이 소설은 유아기 열병을 앓고 일시적으로 청력을 상실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은 그의 성장기를 암울하게 지배한다. 또한 소설 속에는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과정과 문학상을 받은 후, 문학에 대한 그의 고민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 또 다시 찾아온 일시적 청력상실과 `어림잡아 5년 이내에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된다’는 전문의의 진단에 귀와 함께 마음이 먹먹해 진다.
 이 소설집의 발문을 쓴 장은수 문학평론가는 그를 `농담의 악마’로 부른다. 열정과 확신을 갖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작가 박형서. 소설 속 그가 그려낸 인물들은 무한한 우주 속 하나의 점일지 몰라도, 그의 문학은 무한한 우주 속, 단 하나의 텍스트로 존재할 것이다.
 박형서. 문학과지성사. 291쪽.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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