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여백으로 평범한 일상이 주는 사유를 담다
  • 이경관기자
텅 빈 여백으로 평범한 일상이 주는 사유를 담다
  • 이경관기자
  • 승인 201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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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 윤희상 지음 l 문학동네 l 108쪽 l 8000원

 

[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낮은 의자에 앉아서/그림을 그리는 친구의 애인이 나에게 말했다// 혹시, 알아요?/수채화는 젊은 사람들이 그리기 어렵다는 것을// 왜요?// 수채화는 물감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해요/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다시 손이 가거든요/버릇처럼” (`오래 남는 말’ 중)
 세계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풍경과 일상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해 온 시인 윤희상. 그의 세 번 째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이 최근 출간됐다.
이 시집에서 그는 언어의 절제를 통해 여백을 마련, 그 텅 빔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눈 내리는 날,/한가운데 텅 빈 마음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니다/스산한 바람만 불었다/비움으로 끝내는 남아 있는/중심의 괴로움을 처음에는 몰랐다/중심은 사라지고/주변은 드러나는 풍습이 그만큼 낯설다/그렇다고, 마음이 갇히지도 않았고/열리지도 않았다/흥미로운 것은/다 먹혔을 때만/둘이 서로에게 고요히 번진다/안과 밖이 서로에게 스민다/둘이 다투지 않는 고즈넉함이다/너와 내가 하나이듯이/빛과 어둠이 하나이듯이/밤과 낮이 하나이듯이/마치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그대로 하나의 몸이다/그리고, 흩어진다/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도너츠’ 전문)
 그는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을 통해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얻어진 자신만의 철학을 시에 담았다.
 시 `도너츠’는 외로움의 연속인 삶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뻥 뚫린 도너츠는 현대인과 닮았다. 그것은 서로 마주할 수 없는, 소통이 단절된 우리의 모습이다. 비로소 없어져야만 하나로 스며들 수 있는 관계의 가벼움은 답답하다 못해 씁쓸하다.

 “지붕을 세우고, 방을 만들고, 창을 냈다/해가 뜨고, 달이 뜬다 나는/네이버와 다음과 싸이월드와 야후와 엠파스와/드림위즈와 구글과 유니텔에 깃들였다/블로그와 블로그 사이에서 나는/만나고, 헤어졌다 울고, 웃었다 눈을 뜨고, 잠이 들었다/(…)/그럴수록 나는 그곳에서 안거했다/(…)/아버지였다가, 어머니였고, 여자였다가, 남자였다/나이도 다르고, 얼굴도 달랐다/목소리도 다르고, 생각도 달랐다/나는 곧바로 많은 아이디의 이름들로 이탈했다/마우스들이 쉴새없이 나를 물어 날랐다/낯선 땅과 밤하늘과 바다에 흩뿌려졌다/가면을 잃고 허둥대는 날도 있었다/끈끈한 탯줄을 끊고 부유했다/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는 니콜라이였다/니콜라이는 니콜라이를 몰랐다” (`가면무도회, 또는 너무 많은 나’ 중)
 현대 사회는 스마트폰 보급과 SNS 발달로 전 세계 사람들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시대다. 시 `가면무도회, 또는 너무 많은 나’는 SNS 속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은 사생활 노출증에 걸린 환자처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SNS에 올린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바라봐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은 댓글과 `좋아요’로 타인과 소통한다. 그들에게 관계는 `친구추가’와 `친구끊기’로 정리된다. 표정도, 소리도 없는 그들의 외침은 공허하다.
 “즐겨 찾는 서점이 있던 자리에/전자오락실이 들어서더니/다시, 음식점이 되었고/바쁜 걸음으로 골목을 돌아설 때/그것은 세탁소가 되었다가/어느덧, 커피 전문점이 되었다// 봄이면, 덩굴나무 줄기를 따라/건물이 자란다/당연히, 다 자란 건물은/그 자리에/서점과 전자오락실과 음식점과/세탁소와 커피 전문점이 있던 시절을 모른다 꽃핀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산다/건물을 이제 어항이라고 불러도 어긋나지 않는다/그렇다고 건물이 쉽게 깨질 것이라고/짐작하는 사람은 드물다/그렇다면, 사람이 물고기가 되는 시간이다// 밤마다 불빛에 따라 모든 것이 출렁거린다/낮은 하늘에 물고기 비늘무늬가 둥둥 떠다니는 것은/ 새벽 무렵이다” (`도시는 기억하지 않는다’ 전문)
 무수히 많은 빌딩 속, 생겼다 없어지는 상점들. 그곳에는 우리의 추억이, 또 다른 이의 추억이 있다. 그러나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공간에 대한 기억은 사치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 우리는 추억을 잊고 나를 잃는다.
 윤희상의 시 세계는 소박한 언어의 나열로 펼쳐진다. 현대시의 난해함을 벗어던지고 일상의 언어를 입은 그의 시는 따뜻하고 순박하다. 
 해설을 쓴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우리 시대에 읽기 쉬운 언어로 가장 많은 비밀을 끌어안고 있는 시집”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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