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사랑
  • 경북도민일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사랑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5.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정옥 위덕대 성인학습지원처장
[경북도민일보] 아름다운 지도자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종이 위대한 성군일 수 있었던 것은 독서광이었고, 거기서 비롯된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쳤다. 또한 그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그것이 비록 제도적, 관습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먹은 것을 추진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종이 진정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됐다. 세종은 백성을 자식같이 아내같이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도 그의 애민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세종의 애민정신의 소산은 훈민정음뿐이 아니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국가적 사업에 징발된 군사들은 되도록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세종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임산부의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그럴수록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더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이 많은 자녀를 왕비와 후궁들의 출산을 지켜본 왕이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이것이 바로 세종으로 하여금 노비에게도 산전 산후 육아휴직을 준 것은 물론 남성 육아휴직까지 만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궁중에서 일하는 노비가 해산을 하면 휴가로 열흘을 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을 안 인본주의자 세종은 흥분했다.
 “아이를 낳은 뒤 100일, 애를 낳기 전 한 달을 쉬게 하라.”
 세종 8년 4월의 세종의 지시였다. 그 또한 모자라다고 생각한 세종은 4년 뒤에 세종은 남성 육아휴직까지 만들었다. 이렇게 백성을 어여삐 여긴 왕이었다. 특히 여성을, 그것도 당시 사회 최하층계층이었던 노비는 사람이라기보다 일종의 재산 수단으로 여겨졌던 시대였다. 노비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규례를 만든 임금은 왕비인 소헌왕후의 자녀 출산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인본주의적 정책이었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는 왕비로서, 국모로서, 여성으로서 최고의 작위를 누렸다. 내명부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헌왕후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멸문지화를 당한 친정 식구들의 참상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시아버지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안씨를 관비에서 풀어준 것이 친정에 대한 유일한 속죄였을 것이다.
 스무 살의 장성한 아들 둘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어미의 참척은 강인하였던 소헌왕후를 몸져눕게 만들었다. 한 번 병석에 누운 심씨는 일어날 줄을 몰랐고 결국 1446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헌릉에 장사지냈다.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으로 합장되었다. 사후에도 함께 하고자한 세종의 바램은 조선 최초의 부부합장왕릉으로 남아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평소 아끼며 사랑하고 서로 존경해마지 않았던 부부였다. 세종은 처가의 몰락에도 왕비의 내침을 적극적으로 막았을 정도로 왕비를 아꼈다. 연이은 아들들의 죽음에 못 이겨 소헌왕후마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망연했다. 살아생전에 맘껏 사랑하지 못했던, 친정의 수난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한 많은 아내의 극락왕생을 빌어주고 싶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평소 불심이 강했으나 조선의 왕후였기에 감히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음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들 수양대군(후에 세조)을 불렀다.
 “네 모후를 위하여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쓴 책을 정음으로 번역하여라.”
 석보상절은 이렇게 소헌왕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남편 세종이 왕명으로 편찬을 지시한 책이다. 한문본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엮은 책을 한글로 옮긴 조선 최초의 번역불경이다. 1447년(세종 29)에 완성된 것을 1449년(세종 31)에 간행하였다.
 기념일에서 다시 국경일로 복원된 한글날(10월 9일). 비단 이날 뿐 아니라 우리 말, 우리 글에 대한 사랑은 365일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새삼 세종대왕의 백성 사랑한 마음과 아내 소헌왕후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되새겨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