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 이경관기자] “미친 사랑의 끝은 왜 고작 결혼이어야 했을까요. 번쩍이다 사라지는 오로라일 뿐이었을까요”(문정희, ‘겨울 호텔’ 중)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아 온 문정희 시인이 최근 산문집 ‘치명적 사랑을 못한 열등감’ 출간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시귀(詩鬼)’ 문정희 시인은 1969년 등단한 이후 50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그녀에게 ‘문학’은 삶 자체였다. 국내에서 펴낸 시집만 15권, 해외에도 9개 국어 12권의 번역 시집을 펴냈다. 문정희 시인은 한국 여성시의 역사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출간한 산문집 ‘치명적 사랑을 못한 열등감’은 시인 문정희와 그녀의 시(詩)의 근원이 된 것들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문 시인을 사로잡았던 눈부신 아티스트들과, ‘자유와 고독과 감각’을 찾아 방황하고 떠돌았던 공간과 시간들, 그 만남의 전율을 이 책에 담겨있다.
“나는 길을 사랑한다. 길 위에서 받은 선물과, 길 위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수많은 영감과 인연들을 늘 보석처럼 간직하고 있다. 케루악의 소설처럼 나의 모든 여행이 진정한 자유와 부랑자의 길을 찾아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해도 나는 참 많이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곤 했다.”(‘길 위에서 On the road’ 중)
그녀는 방황하고 떠돌며 만난 눈부신 예술의 시혼들인 미당 서정주, 파블로 네루다, 프리다 칼로, 예세닌, 그리니치빌리지, 시칠리아, 베네치아, 우드스톡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전율의 만남에는, 우선 스승과 제자로 36년간 인연을 맺은 미당 서정주가 있다.
또한 그녀는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집 앞에서 가져온 솔방울, 발칸반도 코소보 부근 ‘테토보’라는 도시에서 ‘도라지 타령’을 부르던 한 여인을 소환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마흔넷의 미국 출신 무희와 스물일곱의 러시아의 천재 시인 예세닌의 사랑은 마치 두 행성의 충돌처럼 뜨겁고 과격했다. 그야말로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 두 예술가의 만남이었다. 나중에 사랑에 실패한 예세닌이 알코올 중독과 자학으로 뒹굴다가 자살을 한 곳도 바로 이 호텔이라고 한다. 미소년처럼 아름다운 금발의 시인은 술에 취해 시를 쓰다가 잉크가 떨어지자 그의 팔을 칼로 그어 흐르는 피를 찍어 마지막 시를 썼다고도 한다.”(‘잘 있거라, 나는 슬픔을 보았다’ 중)
또한 예세닌과 이사도라 덩컨의 신혼 여행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느 호텔방과 잭 케루악의 연인이 살았다던 그리니치빌리지의 한 아파트,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두 여성과의 시칠리아 여행, 군사정권 시절 김지하 시인이 어머니에게 “나의 애인”이라고 문정희 시인을 소개하던 날의 기억까지 그녀에게 예술의 근본이 됐던 그 기억들을 토해낸다.
그녀는 책을 통해 나의 기억 속 모든 만남은 “문학을 향한 열정을 불어넣었고, 문정희 시 세계에 밀도를 가져다주었던 근원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만남은 불꽃과 같아서 치명적인 화상을 남긴다. 눈부신 예술가들과의 만남, 자유가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도시와, 우울의 습기 자욱했던 정신들과의 만남, 그 모든 만남은 사람의 생을 전환시키는 치명적인 전율이 되기도 한다. 자유혼을 찾아 떠돌며 방황하고 헤맨 끝에 결국 내가 만난 것은 “나와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나의 열정과 밀도의 근원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이 책은 작지만 나의 생을 전환시킨 불꽃들이다”라고 썼다.
예술의 씨앗이 되고, 또 그 자체로 ‘시인 문정희’가 됐던 순간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한 편의 찬란한 기록으로 다가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문정희 지음. 문예중앙. 236쪽.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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