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생규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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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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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를 읽다

-한상권

여름 저녁 어느 귀기 높은 담장 앞에서 허공을 휘젓는다. 무꽃 같은 바람을 타고 수천 담장 너머 색색풍선도 솟아오른다. 한생은 초록 붓검을 앞세우고 일필휘지. 오호, 공중에 꽃 천지다! 살랑바람 올라타고 이런 호사가 어디 있나, 바람꽃 살구꽃 건너 어느새 구름궁궐,

여기가 당신의 마음속인가. 모든 꽃나무에 당신 위한 시를 걸어두리. 한생은 바람 시편 하나 벚나무 앞에 붙이고 당신은 고독한 왕국의 여인이라고 읽는다. 당신의 마음을 얻는 일이 이리 간단해서여, 이윽고 협곡을 지나 복사꽃나무로 향하는데 아뿔싸, 저기 구름군사 겹겹이 도사린 채 도깨비 깃발 앞세워 한생 앞을 가로막는구나. 아니 나무와 나무 사이 꽃들이 사라지고 보고 싶은 당신은 구름 담장 밖이다. 한생은 단숨에 뛰어넘을 버들그네를 생각했지만 마음속 품었던 말, 단 한 줄도 호령하지 못하고 무딘 산벚나무 붓검 급하게 둘러멘 채 구름 성채 아득한 허공으로 굴러 떨어진다. 돌아보니 도처에 무형의 담장 에워싸고 내 손을 잡아요, 떨리던 말은 구름 속에 묻힌다.
어떻게 걷어낼까, 마음속 결기 세운 두려움. 허공을 향한 허세의 곁가지는 얼마나 될까. 형체 없는 모든 미로의 시는 찢어 버려야 해, 꽃을 놓아라 꽃을 가장한 지난 말들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 일이나 시작되는 법, 담장으로 빛났던 시간은 한순간에 버리고 자정이 지나면 당신 창문에 사다리를 세우거나 경계 없는 최후의 꽃잎으로 흩날리리. 한생은 손을 뻗어 구름담장 해체를 선언한다. 남은 책략이 없는 정면승부다. 두렵고 흔들리는 방향이지만 허공의 어느 지점에서 사방으로 봉인된 당신의 심연을 열어젖힌다. 캄캄한 어둠이 쏟아진다. 당신은 무화의 시어를 더듬으며 울 것이다. 몇 백 년 뒤 사람들은 서로 기울어 출렁이는 나무의 시를 읽을 것이다.

구름의 한 귀퉁이에서 수없이 넘어지고도 바로 앞에서 손 내미는 도꼬마리씨 하나 못 보고 아아, 한참을 졸았나보다. 감잎 찻물 식어도 구름의 높낮음은 찻물 한 잔에 불과한 것, 깨어보니 어떤 무게도 나무들의 직면을 막을 수 없구나, 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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