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켜놓고 잠들었다
  • 경북도민일보
라디오를 켜놓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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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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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권

   백악기의 공룡 한 마리가 나타나
침대 위에 널브러진 내 발을 잡았다.
살짝 발을 빼려고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나는 작고 힘없는 풍뎅이에 불과했다.
나는 잠시 초원을 뛰거나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상상을 했지만
아뿔싸, 침대에서 뒤로 물러서다 떨어져
나는 땅속으로 끝없이 곤두박질쳤다.
끝없는 나락 속에서 얼마나 작아져야 하는지
백악기의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 공룡이
자꾸 작아지는 나의 몸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비밀병기가 있다.
지금부터 나비보다 잠자리보다 더 작아졌다가

내 몸의 작고 단단한 촉수를 뽑아
저 땅속의 비밀을 모두 거둬갈 것이다.
먼저 깊디깊은 지층으로 내려가
눈이 큰 화석 여자의 손을 잡으리라.
수억 년 전 꽃잎 화석 꽃 진 자리를 찾아
모든 비밀의 동위원소를 지워버리고
그 여자와 빛나는 알 하나를 낳으리라.
눈치 없는 공룡이 큰 발로 사방을 차단하면
나는 무한히 작아졌다. 커졌다 반복하면서
격렬하고도 은은한, 무너지지 않는 지붕을 짓고

눈부신 아침햇살로 저녁이 있는 집을 잉태하고

텅 비어 더 충만한 마당을 새로 지으리라.
좋다 게 섰거라 공룡아, 하는데 주파수가 흔들렸다.
지구를 흔드는 엷은 파동의 라디오 소리
심야의 희망곡이 나를 나른하게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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