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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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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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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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살로메 작가

[경북도민일보]  “제를 제라니 샌님 보고 벗하잔다.”라는 속담을 만났다.
 앞뒤 맥락 없이 우연히 발견한 문구인데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번이나 나오는 ‘제’라는 말의 의미를 궁리하다가 인터넷 사전을 찾아봤다. ‘상대를 대접해서 공대를 해주니 되지 못하게 윗사람 보고 벗하며 사귀자고 한다는 뜻으로,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남들의 대접에 대하여 예의 바르게 대할 줄 모르고 공연히 우쭐대면서 건방지게 구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뜨악했다. 촌철살인하고 통찰력 깃든 조상들의 속담 잔치에 웬만하면 공감하게 되는데 이 속담 앞에선 어깃장을 놓게 된다. 뭔가 불편한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친다. 우리 사회의 온갖 갑질 행태가 이런 속담에서 출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이 속담의 뜻은 ‘네 주제를 알고 설쳐라.’ 쯤이 되겠다. 지체 높은 선비가 신분이 낮은 이에게 ‘내가’라고 말할 것을 ‘제가’라고 말한다. 자신을 낮춰 겸손 된 마음을 전하려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의도만은 아니다. ‘신분 낮은 네가 감히 나더러 친구하자고? 어림도 없지.’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속담을 선비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버릴 의향이 전혀 없다. 오히려 계급의식을 고착화시키려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샌님이고 너는 하층민이라는 의식을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선비가 내뱉은 겸양의 말은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 상대와 나를 더욱 구분 짓게 하는 거짓 언사가 될 뿐이다. 신분 사회의 구조적 사슬을 벗어 던지지 못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태생된 말이니 으레 그럴 것임을 알면서도 삐뚤어진 상념은 가라앉질 않는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시혜를 베푸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다하는 셈이다. 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하는 예의는 굴종 또는 비굴의 다른 이름일 만큼 일방적인 복종을 내포한다. 계급이 다르면 예의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저 속담 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양이 부족한 사람’, ‘건방지게 구는 것’에 해당되는 이는 오직 아랫사람이다. 윗사람이기만 하다면 ‘교양’이 부족해도 ‘건방’을 떨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뭇매를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진심으로 나를 낮출 마음이 있다면 상대를 하대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잔을 낮게 드는 자 앞에 더 낮게 잔을 들어 상대를 대접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잔을 낮게 드는 자가 진심으로 그러는지 아닌지 상대는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나는 너와는 다른 계층이야. 그러니 확실한 경계를 지을 필요가 있어. 이런 그릇된 마인드로 무장된 사람들이 갑질을 한다.
 계급의식이 가득 찬 상태에서 발휘되는 모든 호의는 진정성을 의심 받는다. 우월한 위치에서는 동료의식이나 연민 대신 이기적 자의식이 먼저 들어찬다. 당연히 현상을 왜곡하고 갑질을 일삼게 된다. 이런 우월적 행태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는 측면에는 전통적인 위계질서 의식이 깃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혜를 베푼다는 특권 의식 앞에 대부분의 약자는 저항할 명분도 비판할 의식도 갖지 못한 채 비굴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을의 개체들이 굴종과 모욕을 거부하고 제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이 오점이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진정한 샌님은 대상 앞에 우월한 계급의식을 밑장으로 깔지 않는다. 거짓 겸양으로써 타자와 자신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선비라는 것을 잊고 약한 계층에게 진심으로 다가간다.
 인사에 선후 없고, 예의에 상하 없다. 그런 사회야말로 매끄러운 민주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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