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을 호령하던 太王은 유리벽 속에 封印되다
  • 모용복기자
중원을 호령하던 太王은 유리벽 속에 封印되다
  • 모용복기자
  • 승인 2017.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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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新동북공정 현장을 가다-3. 유리에 갇힌 정복의 역사
▲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태왕릉. 출토된 유물과 무덤구조로 미루어보아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 상층부 곳곳에 자갈돌이 쓸려내리고 기단석이 무너져 마구 흩어져 있는 등 훼손이 심각한 상태다.

고구려 유적의 보고 집안시
中공안들 곳곳 삼엄한 경비
위대한 정복의 역사 기록한
무게 37t 동양최대 금석문
태왕비는 유리 속에 갇히고
태왕릉은 훼손된 채 방치

동양 최대 피라미드 장군총
완벽한 형태로 웅장함 자랑
기단부 갈고리 모양의 공법
구리인 돌다루는 솜씨 백미
原形보존 장군총 감시 안해
中 동북공정 두얼굴 드러내

[경북도민일보 = 모용복기자]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무엇이기에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상대방 역사의 부정과 왜곡을 넘어 심지어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전쟁에 혈안인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심양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부터 보고 느끼게 될 천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이 남긴 역사의 파편들 속에서 그 진실을 만나보게 되리라.
동북아지역은 지금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역사전쟁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역사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자국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기에 각국은 양보없는 치열한 전장(戰場)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우리가 동북아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총성없는 역사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현재 전장(戰場)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종군기자의 심정으로 역사전쟁의 현장에서 그들이 찬란했던 우리 역사와 조상들의 혼을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생생한 기록을 통해 우리의 대응책과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태왕비. 유리 속에 봉인된 태앙비 뒤로 공안이 삼엄한 눈초리로 방문객을 감시하고 있다.

- 광개토태왕비가 두려운 中
전날 오후부터 새벽까지 계속해서 내리던 비가 거짓말 같이 그쳤다.
황사가 씻겨나간 영향인 지 비가 갠 아침 공기는 한결 더 맑고 하늘은 높았다.
길림성 통화시에서 두시간 여 걸려 집안시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는 동안 우리 일행 일거수일투족을 훑는 중국 공안 2명의 삼엄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집안시 입구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공안들이 여권 검사를 하는 것부터가 이전 도시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우리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왕 중의 왕, 정복군주의 위대한 업적을 새긴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는 네 면의 유리벽 속에 갇혀 있었다.
높이가 무려 6.39m에 달하고 무게가 37t이나 되는 거대한 비석 앞에서 정복왕 好太王의 위대함과 1600여년 전 고구려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큰 금석문으로 4면에 모두 44행 1775개 글자가 예서체로 음각돼 있다.
주몽의 건국신화를 비롯해 광개토태왕에 이르는 역대 왕들의 치적과 약력,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돼 있다.
또 태왕의 활발한 정복활동과 마지막 부분에는 무덤을 지키는 일을 맡은 수묘인(守墓人)과 관련한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돼 있다.
거대한 비석을 가둔 유리집은 너무나 작아 비석 윗부분은 천장에 닿을 듯하고 내부 공간도 한 두 사람이 나란히 둘러보면 족했다.
‘내부에서는 촬영을 절대 하지 마라’는 안내인 박명군 씨의 신신당부가 있었거니와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건장한 체격의 공안 하나가 의자에 떡 하니 버티고 앉아 날카로운 눈빛을 연방 쏘아대고 있어 카메라를 꺼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사진은 커녕 옆사람과 작은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광개토태왕비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기다림과 설렘으로 보냈던가.
이제 그 역사적인 현장에 서 있건만 사진 한 장 못 찍게 하는 그들의 태도가 야속했다.
중국 당국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경계하는 속내가 궁금했다.
진정 고구려 유적을 보존하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유리벽 밖으로 나와 사면으로 이동하면서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뒷배경이 유리에 비쳐 비문의 윤곽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시키고 밖에서는 내부를 자세히 보지 못하게 무슨 기술을 발휘해 놓은 것인지 음흉한 속내가 있음이 분명했다 .
비싼 입장료까지 챙겨놓고선 되레 관광객의 발길을 막는 격이니 그들의 이중적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비에서 돌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300여 미터를 가면 나즈마한 야산처럼 보이는 능이 나온다. 광개토태왕릉이다.
안내문을 보면 높이가 14미터, 동쪽 길이 62.5미터, 북쪽 길이 68미터, 서쪽 길이 66미터, 남쪽 길이가 63미터이니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보다도 무려 네 배가 큰 대형 고분으로서 축조 당시에는 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태왕릉은 한 눈에 봐도 방치된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흘러내린 자갈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으며 이끼와 잡초에 파묻힌 기단석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석실로 향하니 그 때까지 벤치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던 공안이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석실 입구와 내부는 역시 사진 촬영이 금지됐다.
아쉬운 마음에 혼잣말로 한마디 내뱉으니 중국 사정에 밝은 박명군 씨가 공안들도 중국 당국이 시키니까 이유도 잘 모르고 그냥 하는 것이라고 귓속말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광개토태왕비와 태왕릉 사이에 수양버들을 닮은 나무가 길 양 옆으로 일렬로 늘어서서 가지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마치 왕에게 경배라도 하듯이.
하지만 태왕비와 태왕릉의 관리상태와 어울리지 않는 화산석으로 조성된 3~4m 너비 돌길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중국이 ‘염불보다 젯밥’에만 공을 들이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다.
 
 

▲ 광개토태왕비에서 약 1㎞ 거리에 위치한 장군총.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릉 무덤으로 추정되며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왕릉 중 외형이 가장 완벽하다. 적석이 밖으로 밀려나가지 않도록 높이 약 5m 가량의 거대한 정호석을 각 면에 3개씩 기대어 세웠는데 현재 북쪽면의 1개가 없어져서 모두 11개가 남아 있다.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광개토태왕비에서 1km를 가면 장군총이 있다.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증거는 아직 없다.
장군총은 그 크기도 웅장하거니와 거의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고구려 왕릉을 보는 즐거움을 준다.
기단부에는 큰 돌을 깔고 위로 올라갈 수록 점차 작아지는 피라미드 형태 무덤이다.
대형 화강암을 깎아 정사각형으로 쌓아 7층으로 올린 거대한 방형계단석실묘다.
일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이란 프로그램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장군총 축조에 들어간 화강암이 1만9000t(5t 트럭 3800대), 흙 1만2500t(5t 트럭 2500대)에 달하며 동원된 인원 만도 5만명이라고 하니 가히 동양 최대의 피라미드라 할 만하다.
기단부에는 한 면에 세 개씩 정호석을 비스듬히 세웠는데 무덤의 돌들이 밀려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박명군 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한 면마다 일정하게 세 개씩의 호석을 배치한 것을 보면 기능적인 면보다는 ‘3’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 무게가 간다.
3은 세계 모든 문명권에 단골로 등장하는 숫자다,
우리나라도 신화에 숫자 3이 흔하게 나오는데 단군신화의 환인, 환웅, 단군이 대표적이다.
또한 천제 환인의 서자 환웅은 천부인 세 개와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으로 내려왔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고향을 떠날 때 따라왔던 신하들도 오이, 마리, 협보 세 명이었다.
주몽의 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 나설 때도 옥지, 구추, 도조라는 세 명의 부하들이 그를 따라왔다.
집안 어디를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삼족오(三足烏)도 다리가 셋인 까마귀다.
삼족오가 태양에 산다는 까마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서 왕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왕을 수호하는 상징물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나오듯이 고구려 왕들은 천제의 아들로 여겼으며 고분에서 시신을 안치한 현실이 땅속에 있지 않고 태양에 가까운 상층부에 위치한 것도 태양 숭배사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정호석은 북면 쪽 1개가 사라져 지금은 11개가 남아 있으며 무게는 가장 작은 것이 15t이 넘는다 하니 이 거대한 돌들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운반해 왔는지 수수께끼다.
장군총을 구성하고 있는 돌들을 보면 외형의 웅장함 못지 않게 고구려인들이 돌을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보여준다.
 

▲ 장군총 기단부에 적용된 ‘그랭이 공법’. 고구려인들의 정교한 돌 다루는 솜씨를 알 수 있다.

기단부는 ‘그랭이 공법’을 이용해 아랫돌에 정교한 홈을 내어 갈고리처럼 웃돌과 맞물리게 쌓아올렸는데 돌 하나의 무게가 수 톤에서 수십 톤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들의 솜씨와 정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가까운 세월이 되도록 무덤이 변형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상한 것은 고구려 유적 어디를 가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공안들이 장군총에는 안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감시·단속을 강화하는 이유가 유적 보존 차원이라면 그 대상이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인 장군총 만한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수상한 정책 덕택에 장군총은 시신을 안치한 현실을 빼고는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하겠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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