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만 보이는 장미
  • 경북도민일보
당신에게만 보이는 장미
  • 경북도민일보
  • 승인 2019.0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성은의 사적인 LP
에디트 피아프의 ‘Classiques Inoubliables’ 를 들으며

[경북도민일보] -묘지로의 산책
첫 유럽 여행의 말미에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의 나흘을 어떻게 쓸지 고심하고 있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시기였고, 육체적으로도 장성한 나이였다. 어디로도 갈 수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엇하나 확실한 건 없었지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낮은 밤으로 밤은 아침으로 나아가듯 조금씩 세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여정이었기에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해 프랑스 남부의 아를과 아비뇽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남은 여정은 일행과 헤어져 홀로 떠돌아다닐 계획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책으로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싶었고, 영화 속 길을 걷고 싶었다. 작은 카페에서 몇 시간이나 앉아 있거나 화려한 명품상점을 거리낌 없이 방문해도 좋을 것이었다. 비행기 날짜는 어느덧 나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파리는 첫 방문이었고, 자주 올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남은 기간을 몽파르나스, 페르 라셰즈, 몽마르트르 이 세 묘지를 걸어다는 것에 쓰기로 결심했다.

-에디트 피아프

그곳에는 내가 책과 영화를 통해 만난 이름들이 작고 단단하게 새겨져 있었다. 스마트폰이 막 보급되던 시기였기에 아직까지는 인터넷보다는 종이 지도가 더 편리했다. 묘지는 한산했고, 걷기에도 쾌적해 길을 잃어도 좋을 것이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자크를, 프루스트와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풍경을 찾아다니려고 애썼던 걸까. 파리의 수많은 얼굴 중 어떤 얼굴을, 어떤 표정을 발견해내려 했던 걸까. 나는 어떤 색으로 물들어가고 싶었던 걸까. 묘지에서 마주친 몇몇의 사람들은 종이 지도를 펼쳐가며 탐험하는 나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 마음이 나의 발길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나는 파리의 오래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오래됨이란 센 강의 변치 않은 모습이기도 하고, 에펠탑이라는 기괴한 철골 구조물의 상징성이기도 하다. 루브르와 오랑주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기도 할 것이고, 대성당의 오르골 소리와도 같은 장엄한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만나고자 한 대상은 내 삶의 행로를 내어준 예술가들, 그들의 흔적이었다. 결국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내가 만나고자 한 사람의 얼굴 앞에, 작은 체구 앞에, 누구보다 여린, 아니 세상 무엇보다도 강한 목소리 앞에 서게 되었다. 프랑스의 목소리라고 해도 좋을 에디트 피아프의 묘지에 도착한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 묘지.
에디트 피아프 묘지.

-당신에게만 보이는 장미
에디트 피아프를 한번 만난 사람은 평생 그 목소리를 잊기 힘들다. 작은 참새라는 뜻의 피아프는 그녀의 체구에 대한 별명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놀라운 생명성은 그 자체로 한 존재를 증명해낸다. 격동하는 파도의 목소리이기도 하면서 여린 떨림이 공존하는 그 양가적 소리의 골은 그녀의 인생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가사가 자체로 시이기 때문일까, 그 시는 그녀의 입 안에서 단순하게 발화되지 않는다. 운율을 쥐었다 펴며 마디를 가지게 되고 음정과 음색을 여러 갈레로 퍼트리며 입술 끝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녀에게 노래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불러지는 것, 사랑과 고통과 비극과 숭고의 기나긴 여정을 모두 통과하여 나오게 되는,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가 그녀를 ‘장밋빛 인생’으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내가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의 묘지를 찾은 이유는 삶과 죽음에 대한 충동과 충돌을, 나도 모르게 발견하게 된 삶의 허무를 쉽게 인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묘지를 떠나지 못했고 이미 죽은 예술가들 곁에서 무언가를 견뎌내며 있었다. 그리고 그건 울음에 가까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억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하루를 지나쳤다면 내 삶의 행로는 지금과는 달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에디트 피아프는 국적과 인종을 넘어, 세대를 아울러 듣기에 좋은 목소리다. 삶의 짙은 향기가 배어나오지만 그 속에는 어떤 생명보다 강렬한 젊음이 담겨 있다. 누군가 내게 파리의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그녀의 곁에 다가서는 것, 그 목소리를 깊이 느껴보는 순간을 권할 것이다. 그것은 오래된 장미의 목소리다. 그 장미의 색이 어떤지 알려줄 수는 없다. 그건 오직 당신에게만 보이는 장미이기 때문이다. 오성은 작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기사
  • 경북 포항시 남구 중앙로 66-1번지 경북도민일보
  • 대표전화 : 054-283-8100
  • 팩스 : 054-283-5335
  • 청소년보호책임자 : 모용복 국장
  • 법인명 : 경북도민일보(주)
  • 제호 : 경북도민일보
  • 등록번호 : 경북 가 00003
  • 인터넷 등록번호 : 경북 아 00716
  • 등록일 : 2004-03-24
  • 발행일 : 2004-03-30
  • 발행인 : 박세환
  • 대표이사 : 김찬수
  • 경북도민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북도민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HiDominNews@hidomin.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