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들의 ‘불쏘시개’
  • 모용복기자
초선들의 ‘불쏘시개’
  • 모용복기자
  • 승인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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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발단이 되는 ‘불쏘시개’
조국처럼 다른 데로 번지거나
홍콩 시위처럼 엉뚱한 불씨가
큰불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어
초선들 잇단 총선불출마 선언
당리당략 매몰돼 政爭 일삼는
정치 현실에 한계 느낀 때문

2년 전 전북 전주의 한 장례식장. 새벽녘 텅 빈 주차장에 검은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속속 도착했다. 이어 차에서 내린 건장한 사내들 손에는 야구방망이, 골프채 등이 들려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조폭(조직폭력배)들임을 알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은 서로 몇 마디 주고받는가 싶더니 둔기를 마구 휘두르며 집단난투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섬뜩한 장면을 연출한 이들은 전주지역 양대 폭력조직으로 불리는 월드컵파와 오거리파 조직원들이었다. 경비원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검거된 조직원의 수만도 무려 40여명에 달했다고 하니 이날 싸움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칫 했으면 장례식장이 문상객으로 때아닌 문전성시를 이룰 뻔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집단난투극이 벌어지게 된 계기가 참으로 어이없었다. 이들 폭력조직 중 한 조직원이 자주 찾는 카페를 찾았다 여종업원으로부터 상대 조직원이 자기네 조직을 두고 “별거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전한 게 발단이 돼 이날 장례식장에서 만나 ‘승부’를 겨루게 된 것이다. 결국 카페 여종업원의 말 한 마디가 ‘불쏘시개’ 역할을 해 폭력조직간 살벌한 난투극으로 비화된 사건이다.

불쏘시개는 불이 잘 옮겨붙도록 마중물 역할을 위해 태우는 낙엽·종이 등을 일컫는데, 흔히 중요한 일의 발단이 되는 사소한 일을 비유해 사용하기도 한다. 최근 법무부 수장에서 도중하차한 조국 전 장관이 퇴임의 변에서 “검찰 개혁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은 여기까지다”라고 밝혀 화제가 됐다. 한 달 여간의 장관 재임 끝자락에 내놓은 검찰개혁 방안이 이후 본격적인 검찰개혁 추진에 마중물이 될 것임을 염두에 둔 말이다. 하지만 ‘조국의 불쏘시개’는 검찰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먼저 활활 타올랐다. 최근 막을 내린 20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는 그야말로 조국으로 시작해 조국으로 끝이 났다. 두 쪽으로 나뉜 정치권은 여당의 ‘조국 구하기’와 야당의 ’조국 죽이기’로 상임위마다 막말과 비방, 고성과 욕설이 난무한 가운데 민생과 정책국감은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국회의 정부 국정 전반에 대한 감사활동이나 국민의 알권리 제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회 본래 기능인 감시와 견제기능이 작동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조국의 불쏘시개’는 어쩌면 무능하고 무책임한 우리 정치의 민낯을 드러나게 한 불씨였는지도 모른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슈인 홍콩시위는 범죄자를 중국 대륙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한 법안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다. 지난 3월 발발한 시위는 급기야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시민이 부상을 당하고 잇따라 의문사가 발생하는 등 갈수록 격화되고 있으며 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홍콩시위를 촉발시킨 불쏘시개는 어이없게도 무슨 거창한 정치·사회적 문제가 아닌 치정(癡情)으로 인한 살인사건이었다. 지난해 초 대만에서 한 홍콩인 남성이 대만인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콩과 대만은 범죄인 인도협약을 맺지 않고 있어 대만은 이 살인범을 자국으로 압송할 수 없었다. 또한 홍콩은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채택하고 있어 자국민이 다른 나라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할 수 없었다. 이에 홍콩 정부가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한 송환법 추진에 나서자 자칫 자신들도 중국으로 압송될 것을 우려한 홍콩 시민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20여 년 전 영국령에서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된 이래로 심화돼온 홍콩의 정치·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밑바탕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대개 큰 사건들은 사소하거나 엉뚱한 불쏘시개로 인해 큰불로 이어지기도 하고 예기치 못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 붙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애초에 큰불을 기대한 불쏘시개가 진흙탕 속에서 불꽃을 피워올리지 못하고 꺼져 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바로 지금 우리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인 이철희·표창원 의원이 잇따라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초선이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많은 스타급 두 의원의 불출마 선언으로 민주당은 적잖이 충격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지난 3년간 활발한 의정활동과 방송 출연 등 대중적인 인지도를 통해 민주당의 주가(株價)를 올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그래도 국회의원이라면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특권층인데도 이들은 왜 재선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아마도 민생과 협치는 외면하고 당리당략에 매몰돼 연일 정쟁만 일삼는 국회의 현실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들이 비호했던 조 전 장관에 대한 청년층의 실망감과 공정성에 대한 지적도 뼈아프게 다가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뿐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초선의원들이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선의원들의 잇단 불출마 선언이 정치판에 충격파를 안겨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대교체나 전반적인 정치혁신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다만 이들의 불출마가 새바람을 일으킨다면 내년 총선에선 악취가 진동하는 국회에 쌓인 쓰레기를 태울 불쏘시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본다. 그럴려면 먼저 정치와 당이 변해야 하는 데 그걸 기대하기는 지난(至難)한 일이니 정치혁신도 결국 국민의 몫이 아닐까 싶다. 내년 4월, 유권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굴 불쏘시개는 과연 타오를까?

모용복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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