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처럼 불확실한 삶의 여정
  • 이경관기자
여행처럼 불확실한 삶의 여정
  • 이경관기자
  • 승인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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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30주년 함정임 작가
소설집 ‘사랑을…’ 출간
특유의 ‘애도의 글쓰기’로
‘영도’·‘해운대’·‘용인’ 등
10편의 단편소설 수록
함정임 지음. 문학동네. 248쪽.
‘유목민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세계관을 낯설게 풀어내고, ‘애도의 글쓰기’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구축한 작가 함정임.

올해로 등단 30주년을 맞은 함정임 작가가 최근 신작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출간했다.

1990년 소설 ‘광장으로 가는 길’로 등단한 함정임은 30년 동안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아주 사소한 중독’,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등 8권의 소설집과 한 편의 중편소설, 장편소설 ‘행복’등 4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하는 등 꾸준한 소설창작활동과 예술, 여행 등 다양한 분야의 에세이를 출간하며 국내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로 자리매김 했다.

최근 출간한 아홉번째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에는 10편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다.

10편 소설 중, ‘영도’, ‘해운대’, ‘용인’, ‘디트로이트’, ‘몽소로’ 등 5편의 소설이 지명(地名)을 고스란히 제목으로 가져왔다.

함정임의 삶의 궤적이기도 한 이 도시들은 소설의 허구적 스토리와 작가 스스로 생의 한 순간이 겹쳐 흐르며 곡진한 사연을 빚어낸다.

함정임은 이들 도시를 배경으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더욱 새롭게 표현하며 그렇지만 언제고 한 번쯤 겪을 만한 사건을 공감이라는 감정으로 그려낸다.

소설 속에서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 꼭 한 명쯤은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10편의 소설 속에서 함정임은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딸로서, 누군가의 반려인으로서, 동료로서 자신을 쪼개어 보며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어진 상태로 자신을 오롯이 조명한다.

소설 ‘순간, 순간들’과 소설 ‘순정의 영역’은 월남 세대, 실향민들로 대표되는 이전 세대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두 소설에서 화자는 ‘실향민’의 감각을 ‘이방인’의 정서로 환원해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켜 풀어낸다.

소설 ‘너무 가까이 있다’는 빈집 관리를 위해 노부부의 집에 당도한 남성이 책상 위에 놓인 이오네스코의 희곡 ‘의자들’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소설 ‘해운대’는 베트남전쟁 때 파병되었던 한국 군인의 손녀로 보이는 소녀 ‘호아’의 이야기로 한 시대를 환기하게 하는 부끄러움과 그것을 넘어 환대로 이어지는 미래를 그려본다.

“사람이 무엇을 기다릴 때, 내용은 대개 희망 쪽이다. 그러나 오동나무 꽃이 필 때 나에게 찾아온 기다림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소설 ‘스페인 여행’ 중. 108쪽)

소설 ‘스페인 여행’은 작가 스스로 표제작으로 꼽을 정도로 함정임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다.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글이자, 애도를 미리 해버린 사람의 글이자, 애도에 실패하면서 결국 성공하는 것에 대한 글이다.

‘스페인 여행’을 제목으로 했지만, 소설에서는 정작 스페인에 간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화자는 콜레주 드 프랑스 대학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머무는 동안 어머니의 부음을 듣는다.

파리의 지인에게는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다고 말하고선, 어머니의 장례 참석을 위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장례 절차에 따라 낯설게 변화한 엄마와 그런 엄마를 이름 모를 산기슭에 두고 돌아오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간 여정 사이에 꿈에 나타난 스페인 여행이 끼어들고, 다시 파리에서 보낸 한 철이 전개되며 그 사이에 세상을 뜬 어머니와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해설을 쓴 우찬제 평론가는 “소설 ‘스페인 여행’은 세상에 하고많은 사모곡이 아니고, 단지 애도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잔인한 기다림’이라는 정서를 새롭게 발견하고 전경화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때로 엉뚱한 곳에 뜻밖의 삶이 깃들기도 했다. 어쩌다 사람을, 아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처럼.”(소설 ‘영도’ 중. 216쪽.)

소설 ‘영도’는 자살한 영도 출신의 아버지를 애도하느라 속수무책인 기주와 그의 친구 재인, 그리고 그 둘을 매개하는 포르투갈 파두 아티스트 조아나의 관계와 사정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와 함께 재인에 의해 서술되는 소설가 H의 이야기는 함정임 작가 스스로의 지난 삼십 년에 대한 아주 긴 작가의 말이기도 하다. 타인이 되어 자신의 궤적을 좇는 근사한 구성의 소설에는 실제 함정임 작가가 지난 삼십 년간 발표해온 작품집의 작가의 말이 서술되며 소설가 H 생애를 추적한다.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기 위해 철저한 거리감으로 쓰인 이 소설은 함정임이 지난 세월의 글쓰기를 갈무리하는 글이자, 앞으로 새롭게 시작될 작가의 글쓰기의 시작점이 될 작품이다.

“‘네 마음의 푸른 눈’에서 띄워 올린 푸른빛의 환각이 ‘곡두’에서는 헛것 같은 사람에게 내려앉았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추모의 정으로 가득했다. 소설가 H가 이십오 년 동안 소설로 도달한 지점이었다.”(소설 ‘영도’ 중. 210쪽)는 이 문장은 함정임 작가 스스로가 지난 30년의 세월을 회고하는 단 하나의 문장이 아닐까.

함정임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몇 편에는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의 실제 인물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떠나는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격렬한 감정을 가라앉히며 썼는데, 소설이 끝나자, 어떤 한 생이 소설처럼 끝나는 일을 목도하기도 했다. 멋모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삶과 소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롯이 한 세상이다. 나는 다만, 빌려 썼을 뿐.”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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