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수 노란 ‘7cm의 콩나물’ 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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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수 노란 ‘7cm의 콩나물’ 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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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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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딸 세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사랑 독차지하며 자라
19살에 만난 남편, 군대까지 기다려가며 알콩달콩 연애
20년전 콩나물사업 시작… 요즘 생활의 활력소는 ‘국악’

 

김정희 씨 공연 전 기념촬영.
김정희 씨 부부 모습.
김정희 씨.

내 고향은 대구 감삼동이다.
 

김정희 씨 부부 새 집에서 기념촬영.
김정희 씨 부부가 첫 손자와 환하게 웃고 있다.

김정희의 포항이야기<24>

딸 셋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친구들과 함께 집근처 대구 동일직물이라는 직물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시절 누구나 다 그랬지만 셋째 딸이라 귀여움 많이 받았고 상급학교에 진학 하지 못할 정도의 가정형편이 아니었는데도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 시절 여식아들은 그렇게 공부를 안하는 분위기였고 친구 서너명씩 짝지어 차비 갖고 빵사묵고 그 먼 길 걸어 다녀도 깔깔 거리며 재미있을 때 였다.

직물공장에서 실 감고, 베짜고 몇 년 하다 보니 17살 즈음에 벌써 숙련공 대접을 받았다. 그러던 중 꽃다운 19살 무렵에 너무 일찍(?) 백마타고 온 왕자를 만났다. 아저씨뻘 되는 회사근처 내당동 반고개 분식집 주인으로부터 한 살 차이의 남편 김태근(71)을 소개 받았다.

“정희 처제! 우리 고향총각 참 착실한데 소개해 주까?” 그 진담 반 농담 반의 제안에 “그라마 한번 소개해 주이소” 했더니 진짜로 빵집아저씨는 빵집에 재료를 납품하던 ‘착실한’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아저씨가 20살, 제가 19살에 시작된 우리의 교제는 그가 군에 입대하고 맹호부대에 배속돼 월남전까지 참전하면서 3년간의 군 생활 동안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죽 이어졌다.

고무신 바꿔 신을 만도 할 만큼 어린 나이였는데 인연이 델라고 그랬는지 제대 후에도 우리의 ‘알콩달콩’은 계속돼 아들 둘을 낳고서야 대구 달성공원 옆 대원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대구 비산동 친정집에서 신혼살림을 꾸렸고 큰 아들이 돌 지날 무렵, 포항으로 내려왔다.

신랑이 철강공단내 당시 S강업에 취직해서 아들을 등에 업고 내려와 송도동에 월 3만5000원짜리 달셋방을 구했다. ‘포항時代’가 시작된 것이다. 남편은 11년만에 독립하겠다며 퇴직하고 나와 지금의 학산타워 근처에 동업으로 세차장을 시작했다. 세차장 영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갈 무렵 땅주인이 땅을 비워달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길거리로 나 앉아야 했다.

다시 사업구상을 할 무렵, 동해면에서 콩나물재배를 하고 있던 옛 직장동료가 “콩나물 등 부식관련 사업을 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추천하고 마침 콩나물재배공장이 매물로 나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20여년 전 1996년, 우리가정은 경주시 강동면 단구초등학교 옆 콩나물공장을 인수해 본격적인 콩나물사업을 시작했다.


다른 식물들도 그렇겠지만 콩나물도 정직해서 사람이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돌려줬다. 우리는 재래시장과 식당중심으로 납품을 시작해서 차차 규모가 커지면서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울산과 경주, 포항은 물론이고 부산·마산·창원·대구까지 영업망을 넓혔다. 정말 그때는 콩나물에 물을 주면 쑥쑥 자라듯 사업이 급성장했고 특히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기위해 콩나물포장지에 생산자의 이름과 사진을 새겨 넣은 ‘실명제 콩나물’을 개발, 특허까지 출원했다.

그 사이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콩나물사업을 하며 벌인 돈으로 공부시킨 두 아들이 장가가서 손자 손녀를 낳고 품에 안겨주고 나니 이제 콩나물 대신 손주녀석들을 마주하는 일이 유일한 낙이 됐다. 큰 아들은 포스코 출자사에 다니고 있고 둘째 아들은 가업을 이어받아 콩나물공장에서 같이 일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콩나물은 우리에게 정직했다. 보통 콩나물은 온도와 물의 양을 잘 조절하면 일주일만에 7cm정도 자라 출하를 하는데 새벽 5시에 공장에 도착해 싹수 노란 콩머리를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기계면 내단리에 황토집을 지어 이사를 왔고 20여년전 콩나물사업을 시작할 때 맘 맞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 ‘한빛봉사단’의 봉사활동을 남편과 같이 열심히 하고 있다.

3년 전부터 시작한 국악공부도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 요즘 화요일이면 집 가까이 있는 ‘국정국악원’에 나가 오전에는 국악 민요를 오후에는 장고배우기에 빠져 있다. 사람을 키우는 것과 콩나물을 키우는데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콩도 좋아야 하지만, 적절한 물과 온도의 공급, 거기다가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 다만 사람은 싹수가 파래야 하지만 콩나물은 싹수가 노래야 좋다.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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