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당명(黨名)의 가벼움
  • 모용복기자
참을 수 없는 당명(黨名)의 가벼움
  • 모용복기자
  • 승인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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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우리는 假名 즐겨 사용
긴 세월 동안 실력 갈고닦아야
佳名이 세상에 빛나게 되는 법
요즘은 실력 대신 이름만 바꿔
팔자 고쳐 보려는 사람들 넘쳐
정당도 선거 패하면 반성 대신
당명 바꾸는데 정치 명운 걸어
국민 원하는 개혁엔 관심 없어
내용 놔둔 채 껍데기만 바꾸니
애당초 정치발전은 기대 못 해
200년 가까이 이름 안 바뀌는
주요 선진국 정당들 본 받아야
간판 자주 바뀌면 손님도 줄어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가명(假名)을 즐겨 사용했다. 함부로 이름 부르기를 꺼렸던 조선시대에는 성인이 되면 본이름 대신 자(字)를 짓거나, 이름이나 자 대신 평소 편하게 부를 수 있게 호(號)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는 자그마치 호가 500여개나 된다고 하니 우리 민족의 가명 사랑은 알아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추사가 무턱대고 호를 지었을 턱은 없다. 그가 그토록 많은 호를 사용한 까닭은 시·서·화에 두루 능한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예술관이나 철학을 투영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지난해 TV조선 경연 프로그램 미스트롯에서 우승한 송가인(본명 조은심)도 본명이 아니다. 긴 무명생활을 보다 못한 모친이 자신의 성씨에다 가인(노래 부르는 사람)이란 이름을 붙여 예명을 지어주었다. 가수와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송가인이란 이름을 최고 인기가수 자리에 새겼으니 이름 덕도 없지 않았을 성 싶다.

하지만 이름 한 번 번드레하게 지어놓았다고 모두 팔자가 바뀔까? 추사나 송가인은 긴 세월 동안 자신과 씨름하며 실력을 쌓고 내공을 기른 결과 아름다운 이름을 널리 떨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내실을 다지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름 하나 바꿔 팔자를 고쳐 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름이 빛을 발하기 위해선 실력이 뒷받침 돼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실력을 갖춘 인재라야 가명(佳名)이 화룡점정 구실을 해 마침내 세상에 그 이름이 빛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다. 우리 정당들은 선거철만 되면 간판 바꾸기를 밥 먹듯 한다. 선거 패배에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은 뒤로 빠지고 정당 명칭에다 대고 화풀이를 한다. 현(現) 여당인 민주당은 광복 이후 19번이나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됐다. 과거 통합민주당, 민주통합당과 무엇이 다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보수당도 오십보백보다. 5공 때부터만 따져도 6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을 거쳐 지금의 미래통합당이 됐다. 진보당이든 보수당이든 아무리 뜯어봐도 지금 당명이 하등 나을 게 없는데도 정당들은 당명 바꾸기에 정치적 명운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과 합당한 미래통합당이 또다시 당명을 바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자유한국당에서 간판을 바꿔 단 지 채 4개월도 안돼 미래통합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최근 미래한국당 원유철 전 대표가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에게 당명을 ‘미래한국당’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1등 정당’이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있는데다 과거 당명과의 연속성 면에서도 더 낫다는 것이 이유다. 이에 대해 두 사람도 긍정적으로 답해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간판 교체작업이 이뤄질 것이 확실시 된다.

좋은 이름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나무랄 순 없다. 특히 선거에 패배한 정당은 개명(改名) 욕구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차기 선거에서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해선 안 좋은 이미지를 하루 바삐 털어 버리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간판만 바꿔 놓고 정작 국민이 원하는 개혁 정책과 실력 배양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과 내용물은 변하지 않으면서 껍데기만 바꿔온 것이 우리나라 정당의 흑역사다. 그러니 아무리 이름을 바꿔 본들 ‘그 나물에 그 밥’이며 정치 발전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국가발전이라는 대의(大意)는 내팽개치고 권력쟁취 야욕에 매몰돼 온 결과다.

선진국 정당들이라고 부단한 권력의 부침 속에서 어찌 개명 유혹이 없었을까? 하지만 주요 선진국 정당들은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당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실을 다지는데 더 투자를 했다. 선거는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다. 만약 선거에 지면 경쟁력 있는 후보를 발굴하고, 좋은 정책을 만들어 국민에게 어필하는 데 공을 들인다. 선거에 졌다고 해서 당명을 바꾸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보다 앞서 민주주의 제도가 뿌리내린 그들에게 배울 게 있다면 바로 이러한 진중함이 아닐까 싶다.

정치의 생명은 정당이다. 정당의 발전 없이는 정치발전이나 성숙한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 민주정치의 특징인 대의정치는 정당이 기본요소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극한대립과 저질 막말이 난무하는 곳으로 전락한 데에는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겉모습만 바꿔온 정당의 잘못이 적지 않다. 국민 눈을 미혹시켜 한 순간의 이익을 챙기려는 얄팍한 꼼수보다 50년, 100년 정당을 만들기 위해 주춧돌을 놓겠다는 큰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니면 5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한국 정치는 동물국회, 식물국회 생태계 사슬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아무튼 미래통합당이 이번에 새로 바꿔 달 간판은 좀 오래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간판이 너무 자주 바뀌면 단골손님이 적은 법이다. 모용복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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