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부터 짓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 경북도민일보
“내가 사는 동네부터 짓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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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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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핍박 견디다 해방 후 귀국
한국어 못해 중학교 유보 위기도
신흥동사무소 앞 새마을금고부터
경로당·포항종합운동장까지 건설
“자녀들에 베푸는 삶 살아라 말하고파”
김학수 씨가 자신이 건설한 포항종합운동장을 둘러보고 있다.
김학수 씨가 자택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학수 씨가 자신이 건립한 신흥동사무소 앞 새마을금고 기초석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김학수 씨가 가보로 여기는 교지.

포항 건설 1세대 큰손 김학수(상)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유명인사들의 기억들만 기록으로 남겨둬서는 안된다.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모든이들의 기억도 소중한 자산이다.

는 포항문화재단의 협조를 받아 권역별 시민제안사업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일부를 12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한다. 평범한 6인의 사연과 스토리를 매주 1편씩 상, 하로 나누어 싣는다.



△새마을금고도 내손으로 지었지

나는 돈을 몰랐다. 알았으면 투자도 하고 건물을 올렸을 것 아니냐. 자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베푸는 삶을 살아라!” 복은 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따라 온다, 베풀다 보면 복은 어김없이 따라 붙는다.

1980년 12월 25일 새마을금고를 신흥동사무소 앞, 부지 20평에 지었다. 모두 지을 수 있을까 했는데, 내가 충분하다고 했다. 그랬지 아마도 한 40년 전의 일이다.(기초석에 내 이름이 아직 남아있다) 2층은 회의실, 1층은 사무실로 하고 35년 전에 지었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천상 내가 사는 우리 동네부터 시작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경로당도 짓고 마을금고도 내손으로 지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 올 때쯤 이곳에는 벌판이었다. 아마도 왕자맨션, 미주맨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태어난 곳은 포항 동해면 금광리다.

세 살 때 부모님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45년 해방 후, 중학교 1학년 때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포항중학교 전학을 했는데, 우리나라 말을 못하니까 처음에는 안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1달 후, 겪어보고 입학을 결정하기로 하고 유보하기로 했다. 한 달 만에 통과했는데, 처음 수업시간에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피나는 노력을 많이 했다. 공부하려고 우리말을 알아 들으려고 말이다.

△가족 6명 일본行… 혹독한 고생

내가 1931년 태어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못사니까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일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형 둘, 누나, 나 부모님 해서 우리 가족 6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정착한 곳은 북정현(北井縣), 동경 북쪽에서 위치한 곳이다.

부모님은 일본가서 처음엔 광산에서 노동을 하다가 해방 후, 나오기 5년 전부터는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다. 이 곳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는 1등했지만 조센징이라고 반장은 안 시켜주더라. 그래서 부반장만 했다. 매년 학교에서 학예회 발표를 하는데, 선생님이 절대로 발표회에 세워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마 일본 선생님도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발표회에서 뭘 하려고 하지… 만약 나를 세워주면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겠나? 조센징을 세웠다고 가만이들 있지 않았을 것이고…그래도 부반장 임명장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대중 앞에서 연설을 못한다. 왜냐하면 그때 반장을 못해서 그랬다. 그때 반장을 했더라면, 그래서 남들 앞에서 당당히 세워졌더라면, 아마도 내 인생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조센징이라고 핍박도 많이 받았다.

해방되고 나서 가족 모두 우리나라도 돌아왔지만, 결국 형님은 다시 몇 년 살다가 일본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우리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포항시 죽도동 개풍약국 앞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 살다가 생활이 안되니까 다시 고향, 금광리로 가서 농사를 지었다.



△친구랑 공부하러 일본 밀항선 타

쌀값도 올라가고 살기가 힘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갔지. 그 당시 죽도동에는 시장이라는게 없었다. 육거리에서 구 시청 쪽 도로변이 난전이었던 시절이었다. 뭐 포항이 온통 갈대밭이었다. 해방 되고 한 10년 후에 드문드문 시장이 형성됐던 것으로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람 다니는 골목에 앉아서 물건 팔고 그랬지 뭐 난전이라고 해야 하나.

1950년 6.25 전쟁 당시 젊은 사람을 소집해서 제주도 훈련소 보냈다.

포항국민학교는 한국 사람이 다니는 학교였다면, 포항중앙국민학교는 일본사람만 다니는 학교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마 다섯손가락에 들 정도로 드물었고, 재벌들의 자녀만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간단한 훈련만 받고 곧바로 전쟁터로 나갔다.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을 그렇게 사지로 끌려갔다. 중학교 4년 때, 중앙동 육거리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동창 양재식이라는 친구 집에서 자취를 했는데, 방세 안 주고 혼자서 밥해 먹고 살았다. 그 집 바로 옆집에 김성대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공부도 잘했지만, 사상이 불온한 친구였는데 나중에 결국 북으로 올라갔다. 좌익사상으로 물들었던 친구 였는데, 그 친구랑 함께 1950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고 만날 데모하고, 만세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 이러지 말고 우리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둘이서 일본행 밀항선에 올랐다. <계속>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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