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중화요리 트로이카 시대 ‘산증인’ 박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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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화요리 트로이카 시대 ‘산증인’ 박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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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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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살 터울의 형님 따라 중화요리와 인연 맺은 후 50년간 외길인생 걸어
충청도 제천 중국집서 포항 중흥관으로 이직… 큰 규모에 주눅 들기도
당시 고급 음식점이었던 중흥관, 포항제철소 박태준 사장이 단골손님
포항 대진반점 박병도 사장.
제천에서 친구들과 함께
주방장 시절
첫 일터인 제천에서
1986년 해포반점시절

철가방이 黃金가방으로<상>

△한 오십 년 중화요리로 외길 달려와

“헤비급 세계챔피언 조지 포먼하고 무하마드 알리와의 세기의 대결이 있던 게 1974년으로 기억되는데 내가 그 한해 전 여름에 포항에 왔으니 올해로 한 46년째 자장면을 뽑아내고 있는 거거든요”

포항 오기 전, 고향 경북 청도에서 어릴 때 충북 제천으로 가서 반점일을 한 것을 포함하면 한 오십년 외길을 달려온 것 같다.

1973년 그해 여름에 나팔바지 차림에 제 키만 한 가방 두 개를 끌고 포항 육거리 근처 중앙동 중흥관앞에 도착하면서 저의 첫 포항생활이 시작됐다. 손꼽아보니 오토바이 사고로 쉬면서 딱 1년 동안 동네 슈퍼를 경영하며 옆길로 빠진 걸 빼면 포항바닥에서 거진 47년동안 중화요리식당, 소위 말하는 자장면 집을 했다.

포항은 70년대 초 중흥관, 동순관, 부산각 등 중국음식점 트로이카 시대를 맞았다.

1970년대 초 포항바닥에는 상원동, 여천동, 대흥동 등으로 불리는 소위 중앙상가 주변을 중심으로 동순관과 중흥관, 그리고 부산각이 대규모 중화요리집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중흥관은 지금의 육거리 근처 각지에 큼지막하게 터를 잡고 있었고 동순관은 지금의 중앙상가 우체국에서 역으로 가는 곳 가고파 극장 앞 쪽에, 좀 뒤에 생긴 부산각은 아카데미극장이 없어진 지금의 꿈틀로 근방에 있었다. 그 외에 좀 작은 중국집도 대부분 중앙통과 죽도시장 근처에 몰려 있었다. 죽도시장옆 성원반점이 있고 시장근처에 복개춘, 그리고 시청자리 옆에 동해루와 신선반점, 우체국옆에 길성반점, 남빈사거리에 동해춘이 있었다.



△포항 중흥관에서 처음 일 시작

지금이야 횟집이다, 한식이다 갈비집이다 분식집 등등 먹을거리도 푸짐하고 메뉴도 다양할 뿐 아니라 냉동식품과 햄버거, 통닭집 등 이런 음식이 천지삐가리지만 그때만해도 중화요리집은 고급 사교장이자 유일한 회식장소며 외식문화 전체를 대변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포항에 와서 들어간 중흥관 반점 뿐 아니라 당시 포항의 대부분 큰 중국집은 화교들이 주인이었다. 그때 사장님은 후일 포항 시외버스터미널근처에서 중국집을 했던 왕수동씨 부친인 왕문옥씨 였다.

포항 화교들의 대표를 여러번 맡았던 중흥관 사장 왕문옥씨와 부인은 당시 화교사람들이 다 그랬지만 참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하고 검소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왕사장은 내가 반점에 들어섰을 때 자그마한 키에 10대 후반인 저의 옷가방을 열어보고 강의록과 중고등학교 검정고시 책과 한문책이 있는 걸 보더니 주방안에서 먼저 전표 읽는 직책을 부여했다. 이 직책은 막내에게는 파격적인 ‘임명’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손님들이 주문하면 계산대에서 왕사장 부인이 한자로 메뉴전표를 적어서 주방으로 넣는데 그걸 빨리 읽어낼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주방에는 계급별로 아홉명이 근무

중흥관에 도착한 뒤 첫날 주방에 들어갔다가 입이 딱 벌어졌다. 충청도 제천에서 반점에 근무할 땐 사장을 빼면 주방장과 배달사원 등 단 두명 뿐이었는데 중흥관 주방에는 9명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규모가 엄청나서 처음 몇 개월은 주눅이 들었다.

통상 주방에는 사환부터 출발해 기능별로 직책이 있다.

제일 쫄병은 그릇을 씻는 막내 ‘사환’이 있고 그 다음 전표주문을 받아 주방에 전달하는 ‘전표’(뜰) 그리고 주방의 화력(불)을 관리하는 ‘캉구’, 그 위에 면을 뽑는 ‘면판’인데 2명이 더 있었고 또 그위에 요리재료를 칼로 다듬는 ‘칼판’도 2명이 있었다. 그 다음이 주방장 보조인 ‘부주방장’이고 최고인 ‘주방장’을 포함하면 모두 아홉명이 있었다.

이런 계급서열인데 막내를 건너 뛰어 전표를 맡긴 것은 어깨너머로 배운 한문 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사모님이 적어주시는 전표를 받아보면 이 분 한문 필체도 아주 명필이었다. 이렇게 중흥관에서 시작된 나의 포항생활은 한 참뒤 왕문옥 사장이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줄 때인 8, 9년 동안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 중국집 주방일이지, 비교적 촌 같은 충청도 제천에서의 일과는 엄청 달랐다. 손님은 수백명씩 몰려오고 밤늦게까지 그릇은 씻고 또 씻어도 기름진 접시들이 수북이 쌓였다. 식당 종업원들은 대부분 객지에서 와서 10여명씩 합숙을 했는데 보통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면 아침 8시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만 했다. 그런데 일이 보통 힘든게 아니라 몇 번이고 도망치려고 맘 먹기도 했다. 특히 불판을 관리하는 일을 할때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달아날 때마다 붙잡혔고 그 때마다 월급 올라

그때 연탄은 큼지막한 19공탄을 하루에 세 번 갈면 연탄재만 60~70장이 넘는데 처리하는데 한 숨만 나왔다.


그렇게 몇 번이고 도망치려다 잡혔는데 그럴 때마다 탈출을 도와주려고 숙소에서 내 가방을 밖으로 던져주던 동료만 혼구멍이 나고 이상스럽게 내게는 왕사장이 “어떤게 그래 힘드노”하며 그때마다 월급을 조금씩 올려줬다.

“참, 내가 중화요리 일을 천직으로 삼고 평생 일한 동기를 이야기 안했네”



지지리도 산골 깡촌인 청도군 운문면 봉하리에서 태어났다. 경주 산내에서 넘어가다 보면 운문댐 상류 쪽인데 정말 골짜기다.

그땐 다 그랬지만 촌에서는 초등학교 정도만 보내고 그 뒤에 졸업하면 대부분 부모님 따라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밥벌이 하러 객지로 떠났던 시절이었다.

음력으로 1957년 2월생이다. 6형제 중 5째인데 먹고살기 힘들 때라서 귀여움도 못 받고 자랐다. 정확히 말하면 누나가 되는 딸 하나에 아들 아홉 모두 10남매 였는데 누나를 포함해 4명이나 홍역등 질병으로 어릴 때 죽었고 결국 6형제 남자들만 득실득실했다. 원래는 딸 하나에 아들이 아홉명이었다. 당시 분위기를 감안해도 부모님이 자식을 많이 낳았다. 아마 전기도 없고 겨울밤이 길었기 때문인 것 같다.

형제가 많다보니 큰 형님과는 스무살 넘게 차이가 난다.

넉넉지 못해도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며 평온한 가정이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가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여섯 형제를 키우시던 가정의 중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들은 먹고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에서도 두 살 터울로 바로 위 형님인 ‘박상도’ 형이 자연스럽게 저를 중국집과 인연을 맺게 해주었다.

△가출한 형님 따라 충북 제천으로

형님은 그때만 해도 형제 중에는 과감한 성격이라 아버지가 송아지 팔아 숨겨 둔 2만원을 들고 밤에 야반도주를 했다. 나중에 형이 가출한 후 경주역전 근처 중국집에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형님은 경주 연례춘, 경화반점 등 경주역 앞 반점에서 몇 년있다가 경화반점 주인 딸이 충북 제천으로 시집가서 그곳에서 중국집을 차리자 도와줄 겸 직장을 아예 제천으로 옮겼다.

초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 잃고 집에서 농사일이나 돕고 있을 때 상도 형이 일하는 제천으로 나를 불렀다. 처음부터 중화요리 일을 배우러 간건 아니고 낮에는 검정고시와 강의록 등 학교 가는 대신 공부하며 반점의 잡일을 돕기로 하고 숙식도 해결했다. 밤에는 인근 교회에서 야학으로 한자를 깨우치기도 했는데 이게 나중에 포항 중흥관에서 크게 써먹게 된 것이다.

그때 형이 일하던 반점은 제천군청과 전화국·소방서 등 관공서 밀집지역의 ‘승리반점’이었고 주인은 화교출신 사수부씨라는 분인데 경주서 시집간 부인과 사이에 딸만 줄줄이 넷을 낳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를 아들처럼 잘 대해 주었다. 사람을 믿어줘서 주방일 보다는 주로 관공서 월급날 수금하고 돈을 받아오는 일을 맡겼다.

그러다가 형이 먼저 포항으로 일터를 옮기고 3~4년 정도 지났을 무렵 외롭기도 하고 고향집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다고 형에게 전했다. (그때만 해도 청도에서 제천까지는 기차로 7시간 반이나 걸렸다) 사장이 같은 화교인 포항의 중흥관 왕사장에게 장문의 추천서를 써줘서 포항으로 오게 됐다. 어쨌든 그렇게 옷가방 두 개 달랑 들고 그 여름날 포항의 중심가 중흥관 주방에 입문했다.



△포철 박태준 사장도 중흥관 단골손님

그 때 만 해도 포항에서 제일 큰 중흥관에는 각종 연회석이 즐비했고 결혼식도 열렸다. 70년대 초만해도 포항제철소 건설이 한참 진행 중이어서 외지 손님도 많았다. 지곡단지 안에 포스코에서 영일대식당을 짓기 전이니까 당시 포항제철소 박태준 사장도 중흥관 단골 손님이었다.

박 사장이 오는 날은 미리 회사에서 예약전화가 오는데 이때는 식당도 비상이 걸린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와서 원탁이 있는 홀에서 기본 청요리 몇 개씩은 시킨다. 그때 가끔 중흥관 복도를 지나던 박태준 사장은 막내티를 못 벗은 나를 힐끔 보면서 “참 그놈 똘똘하게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그래서 박 사장, 그 뒤에 국무총리도 하신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꼭 빈소를 찾아 국화꽃 한송이라도 얹고 싶었는데 장사한다고 그렇게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먹을 곳이 많지도 않고 식사장소도 마땅치 않아 모두 중국식당으로 몰려들어 일이 너무 힘들었다. 특히 아이들 졸업식 때는 난리가 났고 예식장이 없을 때 중국식당에서 아예 결혼식을 올릴 때라 쉴 틈이 없었다. 그때 70년대 정부에서 분식을 권장할 때여서 분식의 날에는 점심때 면을 먹으려는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루에 수백그릇은 보통이었고, 그러니 못 견뎌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한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혹독하게 주방일을 하는 바람에 그 뒤에 모든 중화요리를 자신 있게 요리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10여개의 반점을 거치며 경영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왕 사장이 그 중흥관을 아들에게 넘기겠다고 할 때 나도 그 식당에서 나왔다. 그때가 아마 스물 세 살 아니면 네 살때 였다. 호적이 2년이 늦게 돼 있어 군대는 그 뒤에 갔다. <계속>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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