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외길 인생’ 김화술씨가 들려주는 포항의 극장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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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외길 인생’ 김화술씨가 들려주는 포항의 극장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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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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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포항 첫 영화관 ‘영일좌’ 부터
6·25 한국전쟁 후에 들어선 ‘포항극장’
현재 롯데시네마까지 항상 시내 중심 지켜
60~70년엔 시민극장 등 지역 내 6곳 존재
김화술씨
김화술 씨가 이한웅 작가와 중앙상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72년 시민극장앞 풍경.
1976년 육거리 시공관 모습.
지난해 포항극장 자리인 롯데시네마 앞에서
지난해 포항극장 자리인 롯데시네마 앞에서
영화 형제 포스터
영화 형제 포스터

포항극장계의 산증인 김화술<상>

△주운 지갑 하나가 맺어 준 포항극장지킴이 38년의 사연

“아이구 포항의 극장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영사기에 큰 필름 한 롤이 돌아가듯이 촤르륵 기억이 재생되는 것 같습니다”

그 만큼 지켜본 게 많고, 말할 기(게) 많지만 기억도 가물가물해요.

사실 나는 주운 지갑 하나 때문에 포항의 극장세계와 인연을 맺어 한 38년 동안 크고 작은 극장 5개를 맡아서 경영도 해봤어요. 참 영화 같은 운명의 시기를 보낸 것 같아 예. 포항의 극장가 시초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쯤으로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요.

가장 먼저 생긴 게 지금의 롯데시네마 자리에 있던 포항극장인데 해방전에는 포항역앞에 자리 잡은 포항거주 일본인들의 보급소였고 그 한참 전에는 ‘영일좌’라 카는 공연장이라 극장하고 연관이 많았다고 해요.

그 공간에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포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쌀이며 공산품등 등 보급품을 놔눠 주는 곳인데 이 보급소에서 한 달에 두 세 번인가 신파극이나 연극 노래자랑 이런걸 보여줬거든. 그러다가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김현목씨 등 상이용사 와 국가유공자 몇몇이 모여서 맹근 단체에서 정부측에 먹고 살 것을 달라고 요구한거야! 이 때만해도 전쟁유공자 단체의 힘이 막강했었거든.

당시 나라에서는 그럼 뭘할거냐고 되물었지. 그 때 김문목씨 등 상이군경회에서는 이 건물을 자기들에게 불하해 주면 극장을 하겠다고 한거야

 
△6·25 한국전쟁 직후 문을 연 포항극장이 포항의 최초 극장

결국 휴전 직후 1953년쯤 이 곳에서 작은 극장이 시작된 거지.

그런데 말이 극장이지 당시에는 무성영화시절이라 의자는 미군 데기로 만들어 엉성하게 배치했고 영사기 옆에는 항상 걸쭉한 말솜씨를 지닌 변사가 대기하면서 화면에 나오는 동작으로 보며 대사를 하는 식이지. 그러다가 변사가 대사를 까먹으면 “이놈이 주패고 저놈이 맞고 또 저 양반이 도망가고~” 해가며 우스갯소리로 재치 있게 넘어가곤 했는데 관객은 화면보다 변사의 재치 때문에 배꼽을 잡았지.

그런데 말이야 그때 상이군경회에서는 이 극장을 운영하면서 또 영사기사를 별도로 데리고 경북도내 시군을 순회하며 장날에 영화를 상영해주고 돈도 많이 모았어. 그런데 국가유공자 단체에서 극장을 한 1년쯤 운영하다보니 힘에 부치는 모양이야. 그도 그럴 것이 극장은 건물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당시에 영상보다는 필름을 돌리고 좌석도 있어야 하고 변사가 일일이 설명을 해줘야 했거든. 좋은 영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자금도 필요했고 서울도 자주 오가야 했어. 이렇게해서 평소 친분이 있고 방위대장을 맡았던 이상조씨에게 넘어갔다가 그 사촌동생인 이상일씨가 여차여차해서 맡게 되었지. 결국 유학을 다녀와 포항중학교 영어선생을 하던 이상일씨는 혼자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서 교사직을 그만두고 본격 극장사업에 들어갔지

그때 영일중학교 교사였던 사촌동생 이상재씨를 불러 매니저를 맡기고 고향 송라에서 큰 양조장과 산판을 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설득해 자금을 모았지. 또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운동을 해서 권투를 잘하고 훤칠한데다 발이 넓고 융통성이 있어 자금 모으기 등에도 수완좋아 사업묵기는 묵기였지.

결국 53년부터 지금의 포항 롯데시네마 자리에서 문을 연 포항극장이 포항의 극장역사를 처음 열었고 그 뒤 이 분이 그래서 돈을 좀 벌기시작해 금세 1957년에 시민제과점 앞에 시민극장을 2층짜리로 지어 올렸어.

또 관객이 (극장에) 들어오기마 하마 뭉태기 돈이 들어와서 1958년에는 목조건물로 낡았던 포항극장을 헐고 그 목재를 뜯어다가 지금 북부시장 뒷편에 ‘대신극장’을 지어 문을 열고 포항극장은 큼지막한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었지.



△1950년 대 말, 포항의 극장은 3개 주인은 한 사람

이렇게 해서 1950년대 말 포항에는 3개의 극장이 영업을 했지만 사실은 주인이 이상일씨 한사람이었어요.

극장은 3개여도 결국 주인은 한 사람인셈 이지.

196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포항극장계에도 독점이 깨지기 시작했어요.

민선1기 문달식 포항시장 땐데 그 분이 지금 육거리 중앙아트홀 자리에 일제강점기때 일본 사찰이 있었는데 이걸 다 지뜯어뿌고 영화도 상영하고 연극도 볼라꼬 시공관을 지었는데 지어 놓기는 했지 예산이 없어 내부는 내부는 텅텅 비워뒀거든. 그 당시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이 김성찬씨였어요. 이 양반이 나중에 아카데미극장도 새로 지어 영업 한 분인데 그때 죽도시장에서 곡물가게도 크게 했고 제일연탄공장도 했거든. 이 분이 문시장에게 “시장님요 그 시공간을 비워 놓지말고 내가 영사기하고 의자하고 비품 사 넣을 테니 내게 운영권을 임대하시요” 한거야.


△포항극장 독점시대 막 내리고, 시공관에 사설 영사기 설치

그래서 일단 김성찬씨가 이 시공간을 2년간 세내어서 극장을 시작했는데 기존 업자였는 이상일씨도 사실 이 김성찬씨와 일본 유학동기로 막역한 사이였지만 이건 공정거래에 어긋난다고 문 시장에게 어필하게 됐어요.

당시에는 상법이나 관련법규가 없었던 문 시장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 그만 시공관 상영관은 이상일씨와 김성찬씨가 동업하라고 하기에 이르렀어.

이렇게 포항장안의 극장업이 친구사이였던 두 사람의 라이벌의식으로 본격 경쟁체제로 접어드는데 의외로 5·16혁명을 전후로 극장업이 재미 쏠쏠하다는 걸 안 김성찬씨는 결국 시공관에서 머지않은 중앙파출소앞에 땅을 사서 아카데미극장을 보란 듯이 새건물로 짓기로 했어요. 1963년에 착공했는데 중장비도 동원하고 콘크리트 건물로 아주 탄탄하게 지어 마침내 1965년 4월20일 ‘아키데미극장’을 개관하면서 포항에 극장이 5개가 된 거죠,

그 뒤에 죽도시장 건너편 옛날 국제나이트 들어서기 전 공터에 여러사람이 투자해서 죽도극장 신축해 문을 열었는데 공사대금 지불과 동업문제로 여러 차례 문을 닫았다가 결국 대전사람한테 넘어가 이라고 그래니 극장은 포항 시민 국제 시공관 아카데미등 5갠데 1965 죽도극장도 공사대금안주고 주인 여러번 바뀌다가 대전사람에 넘어가 1965년12월에 개관 했는데 이것도 결국 다른 경쟁자를 안만들겠다는 이상일씨의 강한 의지가 있어 1968년에 1300만원주고 매입해서 1970년 전에 포항에는 큰 극장이 6개가 들어선 거였어요.



△1962년, 내가 처음 포항의 극장계에 발을 담궜어요

참! 내가 포항의 극장들과 인연을 맺게된 사연을 이야기 안 했네요.

그 후 내가 포항의 극장계와 인연을 맺은 건 1962년쯤이었어요. 이야기의 시작은 1962년보다 4년이나 거 거슬러 올라가 1958년이지. 나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15살쯤 되었을 때인데 가정형편사정으로 상급학교 진학도 못하고 대신동 북부시장 근처 형님 집에서 살면서 양담배를 팔러 다닐 때였어요. 주로 아침일찍 나와서 낮에는 중앙상가에 있던 10여개의 다방을 중심으로 다녔고 저녁에는 송도해수욕장 근처 식당과 술집을 찾아다녔어.

1958년7월인가 여름철일거야 그때 집에 오기전 마지막으로 송도 쪽으로 발길을 옮겼어. 그 당시 송도해수욕장 입구에는 크라운장, 문화장 등 고급 맥주집이 많이 있었고 밤만 되면 신사들이 양복을 쫘악 빼입고 맥주(삐루) 사잡수러 오는데 그곳에 담배를 팔러갔다가 별 재미를 못보고 해수욕장 백사장을 터벅 터벅 걸어오는데 뭐가 발에 툭 걸리는 거야. 그래서 주워서 일단 담배가방에 넣어 집으로 왔었지.

그런데 말이야 형님집 2층에 다락방 같이 내 방이 있는데 일단 내려놀고 방 호얏불 밑에서 주어온 걸 열어보니 두터운 지갑이었어. 여기까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아 그 지갑을 슬그머니 열어보니 이승만대통령 얼굴이 그려져 있는 1000원짜리 지폐가 소복이 들어있었어. 얼마나 놀랐으면 내가 순간적으로 기절할 뻔 하며 뒤로 나자빠졌는데 아래층에 있는 형님 부부가 듣고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할 정도였다니까!!

1000원짜리가 105장 정확히 10만5000원. 당시 소 한마리가 1만3000원에서 2만원 하고 북부시장 근처 논 한 평에 50원할 때 이니 엄청난 돈이지. 내가 평생을 벌어도 만져 볼 수 없는 돈인기라.

어쨌든 처음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눈에는 야! 이돈 가운데 몇백원만 있으면 죽도시장 가서 중학생 구렛바 학생복 한 벌 사 입겠다는 생각도 퍼뜩 떠오더라고. 상급학교 진학한 친구들이 입고 다니던 학생복이 그렇게 입고 싶었거든.

하여튼 그 다음날 새벽일을 나왔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이 엄청난 돈을 잊어버린 사람은 얼매나 답답하겠노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집에서 나와 옛날 포항시청 건물 앞에 와서 지갑을 열어 다시 열어보니 명함이나 신분증은 없고 사진 한 장만 있었어. 이 지갑의 주인같은 남자 한명에 양 옆에 여자 두명이 있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한명은 부인이고 또 한사람은 막내 여동생이었어요. <계속>

자료제공=콘텐츠연구소 상상·도서출판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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